brunch

욕망의 아날로그 보관법

책 한 권에 실려있던 내 우주, feat. 해이

by 김경훈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뇌의 시냅스 회로, 혹은 클라우드 서버의 이진법 코드 속에? 나는 가끔, 우리의 진짜 기억은 사물의 표면에 먼지처럼 쌓인다고 생각한다. 빛바랜 사진의 매끄러운 감촉, 낡은 LP판의 깊은 고랑, 그리고 90년대 잡지의 반질반질한 아트지 위에 남은 희미한 손가락의 유분. 그것들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박제한 물리적 아카이브이며, 우리가 한때 열렬히 욕망했던 세계의 구체적인 증거다. 디지털이 모든 것을 무중력의 데이터로 환원해 버린 시대, 우리는 어쩌면 기억을 저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1. 목소리의 질감


10월의 금요일 오후, 나는 대구의 한 지역 방송국 라디오 부스 안에 앉아 있었다. 방음벽이 모든 외부의 소음을 삼켜버린, 밀도 높은 침묵의 공간. 오직 진행자의 나직한 목소리와, 엔지니어의 키보드 소리, 그리고 내 곁에 엎드린 안내견 탱고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그 침묵의 표면을 부드럽게 할퀴고 있었다.


“오늘 ‘사라진 것들에 대하여’ 코너에서는 해이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내 맞은편에서 ‘해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가 마이크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세계를 감각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잘 마른 목화솜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질감을 가졌다. 그 안에는 이제는 사라진 시대에 대한 애틋함과,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 특유의 수줍은 설렘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잡지를 넘기던 그 손끝에는 나의 사춘기가 있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90년대라는 이름의 낡은 서랍을 열자, 그 안에서 잊고 있던 냄새들이 피어올랐다. 《소년 챔프》의 거친 재생지 냄새, 《미스터케이》 부록으로 딸려오던 향기 나는 편지지의 인공적인 과일 향, 그리고 아이돌 브로마이드의 반짝이는 코팅지 냄새.


2. 욕망의 카탈로그


해이 작가는 자신의 사춘기를 규정했던 그 종이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친구들과 한 권의 잡지를 돌려보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라고 아우성치던 교실의 소란, 라면 국물을 흘린 친구와의 유치한 다툼, 잡지 뒷면의 ‘나만의 캐릭터 공모전’에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그려 보냈던 밤의 기억.


“그때의 잡지는 그냥 책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말했다. “저희의 우주였죠. 신화창조 팬클럽에 가입하고, 오빠들의 애장품을 받으려고 수화기 너머 ARS 음성과 씨름하던 그 모든 시간이… 그 종이 안에 다 들어 있었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추억을 넘어, 아날로그 시대를 통과한 한 세대의 집단적 고백처럼 들렸다. 꼬깃꼬깃한 용돈을 모아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소유하고, 펜팔 코너를 통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과 관계를 맺던 시절. 모든 것이 느리고, 서툴고, 불편했지만 그래서 더 간절했던 시대. 그녀는 팬이 아니었던 ‘량현량하’의 소품함을 애장품 이벤트에서 받고도, 인생 첫 당첨 선물처럼 소중히 여겼다고 했다. 그 작은 나무함은 어쩌면 그녀의 서툰 욕망이 세상과 처음으로 맺은 계약의 증표였을 것이다.



3. 기억으로 보는 세계


진행자가 나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김경훈 박사님은 어떠셨나요? 이런 추억, 공감하시나요?”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내 웃음소리에, 맞은편의 해이 작가가 조금 놀라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입니다. 제 15년의 시각적 기억 속에도, 그 종이의 세계는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내 기억의 서랍을 열었다.

“저는 《콩콩이》와 《코딱지》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과학을 좋아했던 아이라, 《과학소년》을 매달 기다렸죠. 하지만 제 기억 속 잡지의 가장 중요한 감각은 작가님과 조금 다릅니다. 저는 그 매끌매끌한 종이를 넘길 때의 그 손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전자 간행물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잉크가 손가락에 희미하게 묻어나는 그 물질성. 정보가 무게를 가졌던 시대의 감각이죠.”


나는 15살, 시력을 잃기 직전의 어느 겨울을 떠올렸다. 내 방 벽에는 온통 H.O.T.의 ‘캔디’ 시절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털모자를 쓴 다섯 명의 소년들. 나는 지금도 그들의 모습을, 그 사진의 색감과 구도를, 심지어 모자의 털실 질감까지도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렌더링할 수 있다.


“저는 지금도 그 브로마이드를 ‘볼’ 수 있습니다. 기억으로 보는 거죠.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과연 10년 뒤, 20년 뒤에 오늘 본 유튜브 숏폼 영상을 저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4. 큐레이션된 미로, 그리고 탈출구


나는 내 연구 분야의 언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잡지는 그 자체로 완결된 정보 구조를 가집니다. 편집장이 의도한 순서와 위계가 있죠. 표지 기사가 있고, 중간 광고가 있고, 마지막엔 독자 엽서가 있습니다. 독자는 그 큐레이션된 경로를 따라가며 하나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디지털 정보는 어떻습니까? 하이퍼링크는 또 다른 하이퍼링크로 이어지고, 알고리즘은 나의 취향이라는 감옥 안에 나를 가둡니다. 그것은 경로가 아니라, 영원히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인지적 미로입니다.”


나는 해이 작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숨을 죽이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종이라는 매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보를 소유하고, 반복해서 읽고, 그 위에 자신의 흔적(낙서나 스크랩 같은)을 남기는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정보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닻을 잃고, 무중력 상태로 부유하기 시작한 거죠. 해이 작가님이 그토록 선명하게 90년대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기억이 ‘잡지’라는 구체적인 물질적 증거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방송이 끝나고, 우리는 복도에서 마주쳤다. 해이 작가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작가님 덕분에… 제가 왜 그렇게 그 시절을 그리워했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옛날이 좋았던 게 아니라, 그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았던 거였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 역시 작가님 덕분에,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제 방 벽의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탱고와 함께 방송국을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와닿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냈다. 이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과 유리의 판. 이것이 나의 현대판 잡지였다.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었지만, 라면 국물을 흘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억도, 전화요금 폭탄을 맞으며 애장품을 탐했던 간절함도 없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데이터의 잔향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들은 그렇게 손끝의 감각과 함께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참고문헌

https://brunch.co.kr/@haei-story/21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지의 베일 뒤에서 도시를 설계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