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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인터페이스

메를로 퐁티의 신체론

by 김경훈


우리는 데카르트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징하고도 오만한 선언 이후, 우리는 육체를 정신의 불완전한 운송 수단이자, 통제하고 극복해야 할 동물적인 감옥으로 취급해 왔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고, 머리로 사랑하며, 머리로 고뇌한다. 몸은 그저 뇌라는 이름의 중앙처리장치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는 하드웨어일 뿐이라고. 그러나 정말 그럴까. 만약 당신의 몸이 당신의 이성보다 더 깊고 오래된 지혜를 품고 있다면. 만약 가장 난해한 문제의 해답이 당신의 머리가 아닌 피부와 근육, 그리고 장기(臟器)의 미세한 속삭임 속에 숨겨져 있다면. 이것은 가장 이성적인 도구로 세상을 분석하던 한 남자가 자신의 몸이라는 가장 오래된 인터페이스에 접속하는 법을 배우게 된 이야기다.



1. 코드의 미로, 이성의 한계


월요일 오전, 김경훈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얼어붙었다. 그의 연구실은 완벽한 침묵과 질서의 공간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지금 논리적 모순이라는 이름의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국립중앙도서관의 고문서(古文書) 아카이브를 위한 새로운 정보 구조를 설계하고 있었다. 수만 개의 데이터를 가장 직관적이고 효율적인 경로로 연결하는 작업.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경영학적 효율성과 문헌정보학적 체계, 그리고 철학적 일관성까지 갖춘, 그야말로 지성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결과는 처참했다. 테스트 사용자들은 계속해서 길을 잃었고, 시스템 안에서 좌절했으며, 결국은 이탈했다. 코드는 완벽했지만, 경험은 실패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평소의 유쾌한 미소는 사라진 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CPU처럼 과열된 뇌의 열기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의 굳게 닫힌 입술은 이성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좌절한 지식인의 초상이었다.


“크응….”


그의 발치에서 엎드려 있던 안내견 탱고가 주인의 고통을 감지한 듯 불안한 신음 소리를 냈다. 녀석의 따뜻하고 축축한 코가 그의 손등에 와닿았다. 그것은 시스템 강제 종료 신호였다.


“왔어, 자기?”


그의 등 뒤에서 보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그의 가장 연약한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 냈다. 그녀는 그의 굳은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그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코드와 다이어그램만이 가득했다.


“아직도 그 그림자랑 싸우고 있네.” 그녀가 말했다.

“길이 안 보여, 보보. 모든 논리가… 막다른 골목을 가리키고 있어.”


보보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부드러운 스웨터의 냄새와, 희미한 샴푸 향이 그의 과열된 뇌를 조금 식혀주었다.

“자기야,” 그녀가 속삭였다. “머리가 길을 잃었을 땐, 몸에게 물어봐야지. 메를로-퐁티, 잊었어?”



2. 철학자의 처방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저항은 무력했다.

“가자. 당신의 뇌에게 휴가를 주고, 몸에게 발언권을 줄 시간이야.”


그들이 도착한 곳은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오래된 온천이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 오후의 온천은 한적했고, 공기 중에는 젖은 나무와 희미한 유황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보보와 탱고를 로비에 남겨두고, 혼자 탕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신체의 양의성(兩義性)’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내 손이 내 몸을 만질 때, 만지는 주체와 만져지는 대상이 하나가 되는 기묘한 순간. 그는 탕에 발을 담갔다. 뜨거운 물이 그의 피부를 감싸는 감각. 그것은 외부의 자극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그는 지금, 물을 느끼는 동시에, 물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세상과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 순간.


그는 노천탕으로 나갔다. 차가운 가을 공기가 그의 젖은 상체에 와닿는 감각과, 뜨거운 물이 하체를 데우는 감각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시각 정보가 차단된 그의 세계에서 다른 감각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물이 바위를 스치며 내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 소리,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냄새, 그리고 그의 피부 위에서 벌어지는 온도와 압력의 미세한 교향곡.


처음에는 머리가 저항했다. 그는 이 감각들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자신의 프로젝트와 어떻게든 연결 지으려 애썼다. ‘사용자 동선의 유기적 흐름… 액체적 인터페이스…’ 하지만 그의 몸은 그 이성적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저 뜨거움과 차가움, 부드러움과 거침이라는 원초적 감각의 세계로 그를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3. 몸이 들려준 이야기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마침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는 그저, 하나의 몸이 되어 물속에 존재했다. 그때였다. 해답은 논리적 추론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혹은 감각으로 그의 내면에 떠올랐다.


그것은 ‘길’에 대한 이미지였다. 온천의 물길은 가장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라 흘렀다. 막히면 돌아가고, 틈이 보이면 스며들었다. 그것은 설계된 길이 아니었다. 수많은 물 분자들이 지형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만들어낸 길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설계는 너무 오만했다. 그는 사용자를 자신이 정해놓은 완벽한 경로로 ‘인도’하려 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훌륭한 시스템은 사용자가 물처럼, 스스로 가장 자연스러운 경로를 ‘발견’하도록 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기능이나 효율적인 알고리즘이 아니었다. 사용자의 몸이 직관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흐름’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핵심이었다.


그의 머리가 아닌, 그의 몸이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의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비로소 부드럽게 풀리며, 아주 오랜만에 평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이 세상과 나누는 대화를, 그 미세한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4. 가장 오래된 인터페이스로의 귀환


온천을 나온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보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의 편안해진 얼굴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다음 날,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이전의 설계도를 모두 폐기했다. 그는 컴퓨터를 켜는 대신, 눈을 감고 온천에서의 감각을 다시 떠올렸다. 물의 흐름, 온도, 질감. 그는 사용자가 되어, 자신의 몸이 이 정보의 구조 속을 어떻게 헤엄치고 싶어 하는지 상상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보이지 않는 지도를 그렸다. 막다른 길을 없애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고, 사용자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을 설계하는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는 사용자의 몸이 편안히 거닐 수 있는 따뜻한 온천을 만드는 건축가에 가까웠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발견에 대한 짧은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가장 오래된 인터페이스.

데카르트는 틀렸다. 존재는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서 시작된다. 몸은 정신의 감옥이 아니라, 세상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가장 정교한 안테나다.

결론: 정보 접근성이란, 결국 논리가 아니라 몸의 언어를 이해하는 문제다. 가장 훌륭한 시스템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편안하다’고 느끼는 시스템이다. 나는 오늘, 팔공산의 뜨거운 물속에서 내 연구의 가장 차가운 해답을 찾았다.’



메모를 마친 그는 비로소 컴퓨터를 켰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은 비어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모든 길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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