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한때는 상아탑이라 불리며 진리와 지성의 등대로 여겨졌던 곳.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대학은 마치 노쇠한 왕국의 마지막 연회장처럼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만을 희미하게 반추하고 있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는데, 이곳의 시간은 17년 전 어느 날에 멈춰버린 듯하다. 등록금 동결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독배는 시스템 전체를 서서히 마비시켰고, 이제 대학은 스스로 혁신할 동력마저 잃어버린 채, 글로벌 경쟁이라는 거친 파도 앞에서 좌초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것은 먼지 쌓인 상아탑의 복도를 거닐며, 지식이라는 이름의 국경 앞에서 좌절하고 또 희망하는 한 연구원의 기록이다.
1. 회색빛 공기의 밀도
10월의 마지막 월요일, 김경훈은 경북의 어느 사립대학 강당에 앉아 있었다.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미래’라는 거창한 이름의 포럼이었지만, 실내를 감싼 공기는 제목과는 정반대로 무겁고 탁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곰팡내와 난방이 채 돌지 않아 서늘한 냉기, 그리고 발표자들의 목소리에서 배어 나오는 깊은 피로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의 발치에 엎드린 안내견 탱고조차, 이 지루하고 희망 없는 분위기에 전염된 듯 평소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아이폰의 화면낭독기(VoiceOver)를 통해 실시간으로 흘러나오는 발표 내용을 듣고 있었다. 17년째 동결된 등록금, 경직된 교수 평가 시스템, 국제화의 실패. 숫자는 건조했지만, 그 숫자들이 그려내는 대한민국의 대학의 초상은 참담했다. 그는 경영학, 경제학, 문헌정보학, 철학을 넘나들며 쌓아 올린 자신의 지식 체계를 동원해 이 현상을 분석하려 애썼다.
그의 머릿속에서 대학은 하나의 거대한 정보 시스템으로 치환되었다. 등록금 동결은 시스템 운영에 필수적인 에너지원(재정)의 공급을 차단하는 행위였다. 글로벌 경쟁 대학들의 파격적인 인재 영입 전략은 최신 정보(인재)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우월한 프로토콜이었다. 반면, 한국 대학의 시스템은 낡고 폐쇄적이며, 내부의 데이터(교수)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구조였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지적인 얼굴 위로, 그 웃음은 마치 오래된 서류 위의 얼룩처럼 번져나갔다.
2. 다른 게임의 규칙
패널 토론 시간, 마이크를 잡은 것은 뜻밖에도 박민준이었다. ‘AURA’ 프로젝트의 실패 이후, 그는 다시 학계로 돌아와 스마트시티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불안 대신,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자의 냉철함이 깃들어 있었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대학들은 이미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강당을 울렸다. “그들은 교수를 단순한 교육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 산업의 핵심 자산으로 인식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과 연구 환경은 기본이고, 학과장 레벨에서 신속하게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자율권까지 부여합니다. 이건 ‘더 많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김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은 핵심을 짚고 있었다. 이것은 정보 시스템의 ‘아키텍처’ 문제였다. 한국 대학이 여전히 중앙집권적인 메인프레임 모델에 갇혀 있을 때, 경쟁 대학들은 이미 유연하고 분산된 클라우드 네트워크로 전환한 것이다. 각 단과대학과 학과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서버들이 스스로 자원을 확보하고, 최적의 인재를 유치하며, 혁신적인 결과물을 생산해 내는 구조.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인 ‘정보 접근성’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했다. 진정한 접근성이란, 단순히 정보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넘어, 그 정보를 활용하여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권한’과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 시스템은 교수와 연구자들에게 그 권한을 제대로 부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균의 평등’이라는 낡은 프로토콜에 묶여, 탁월한 연구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그렇지 못한 연구자에게는 적절한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시스템.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마치, 모든 도서관 이용자에게 똑같은 대출 권수만 허용하는 것과 같군. 헤비 리더에게는 턱없이 부족하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3. AI 시대의 ‘성과’라는 유령
“이제 논문 편수만으로 성과를 측정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강당을 흔들었다. “AI가 초록 정도는 순식간에 써내는 시대에, 양적 평가는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진짜 창의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 세계적인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탑 저널’ 수준의 결과물만을 성과로 인정해야 합니다.”
김경훈은 이 대목에서 깊이 공감했다. 그의 작업 역시, 단순한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그 데이터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그는 논문의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연구가 단 한 명의 사용자에게라도 더 나은 정보 접근 경험을 제공했는지 여부로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는 정년 연장이라는 인센티브에 대한 민준의 제안에도 귀를 기울였다. 연구자에게 가장 큰 보상은 돈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시간’과 ‘자유’일 수 있다는 통찰. 그것은 마치, 예수회 수도사들이 평생을 바쳐 지적 탐구를 계속하는 것과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었다. 그는 한때 사제가 되어, 평생 진리를 탐구하는 삶을 꿈꿨었다. 그 꿈은 좌절되었지만, 지식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 지식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명은 그의 내면에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대학은 그 소명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오히려 그 소명을 질식시키는 거대한 관료주의의 성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4. 접근 가능한 미래를 위한 주석
포럼이 끝나고, 그는 탱고와 함께 텅 빈 강당을 나섰다. 복도는 싸늘했고, 형광등 불빛은 을씨년스러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오늘의 생각들을 음성 메모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유쾌함을 잃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한국 대학의 미래에 대한 깊은 우려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향한 희미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제목: 접근 불가: 지식의 국경.
대한민국 대학은 지금, 스스로 만든 정보 접근성 장벽에 갇혀 있다. 17년 된 방화벽(등록금 동결)은 새로운 에너지(재정)의 유입을 막고, 낡은 운영체제(교수 평가 및 보상 시스템)는 내부 자원(인재)의 효율적 활용을 저해한다. 외부 네트워크(국제화)와의 연결은 미약하고, 중앙 서버(대학 본부)는 지나치게 비대하며 느리다. 경쟁 시스템들은 이미 차세대 프로토콜(분권화, 성과 기반 자율성)로 전환하여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다이얼업 모뎀 시절의 속도로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
롤즈의 ‘무지의 베일’을 대학 시스템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 불공정하고 비효율적인 구조를 선택할 것인가.
결론: 대학의 위기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정보의 흐름을 막고, 접근을 제한하며, 혁신의 가능성을 질식시키는 시스템 아키텍처의 실패다. 진정한 미래는 가장 뛰어난 소수에게만 열린 폐쇄적인 성채가 아니라, 모두에게 공정하고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하는 열린 광장을 설계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마치, 내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도서관처럼.’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탱고가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는 웃으며 녀석의 등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희망은 이 모든 절망적인 데이터 속에서도, 여전히 길을 찾아 나아가려는 의지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번, 지식이라는 이름의 국경 앞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