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조언.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통화(通貨) 중 하나다. 우리는 경험이라는 이름의 밑천으로 그것을 발행하고, 애정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감싸 타인에게 건넨다.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너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 그 말들은 때로 등대가 되어 길을 밝히지만, 때로는 짙은 안개가 되어 앞을 가린다. 문제는 그 조언을 건네는 자의 손에, 정작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밝혀줄 지도가 쥐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건네는 지도가 이미 폐기된 버전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건지도 모른다. 이것은 낡은 지도를 필사적으로 권하는 늙은 신들과, 그 신들의 황혼을 지켜보는 한 젊은 연구원의 이야기다.
1. 과거라는 이름의 박물관
11월의 목요일 오후, 김경훈은 대학 본부의 오래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정년 퇴임하는 노(老) 교수를 위한 조촐한 기념회. 공기는 먼지 쌓인 벨벳 커튼의 냄새와 희미한 난(蘭) 향기, 그리고 곧 사라질 권위에 대한 예의 바른 침묵으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식어가는 녹차 잔과 아무도 손대지 않은 마른과자들이 놓여 있었다. 김경훈의 발치에 엎드린 안내견 탱고는 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정적(靜寂)이 불편한 듯 연신 귀를 쫑긋거렸다.
김경훈은 아이폰 화면낭독기의 가장 낮은 속도로, 오늘 아침 읽다 만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다시 듣고 있었다. 텍사스의 황량한 풍경, 예측 불가능한 폭력, 그리고 늙은 보안관 벨의 깊은 체념. 그의 세계는 내가 사는 대구의 가을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가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당혹감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김 박사, 요즘 연구는 좀 어떤가?”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김경훈의 사유의 흐름을 끊었다. 오늘 기념회의 주인공, 박 명예교수였다. 그는 일흔을 훌쩍 넘긴 노학자였고, 그의 얼굴에는 평생을 바친 학문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희미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돋보기 너머 눈은 여전히 형형했지만, 찻잔을 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2. 낡은 지도의 강요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교수님. 덕분에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보 접근성 관련해서 새로운 모델을…”
그는 김경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정보 접근성도 좋지만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젊은 학자는 좀 더 근본적인 것에 매달려야 해. 데이터쪼가리만 뒤지지 말고, 거시적인 담론을 구축해야지. 자네 전공이 철학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왜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게 큰 그림을 못 보나 몰라.”
그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질책이었고, 그의 시대가 옳았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 톤과 호흡,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 속에서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익숙한 명령어를 감지했다.
김경훈은 그의 눈을 ‘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그에게 꽂혀 있음을 느꼈다. 그는 내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듯 말을 이어갔다.
“라떼는 말이야, 논문 하나를 써도 세상을 바꿀 각오로 썼어.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임팩트 팩터니, 인용 지수니… 그런 기술적인 것에만 매달려서야 되겠나? 정신을 차려야 해, 정신을.”
김경훈은 속으로 웃었다. 그의 ‘라떼’ 시절, 그가 세상을 바꾸겠다며 썼던 논문들은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 도서관 구석의 먼지 쌓인 유물이 되었다. 그가 비판하는 ‘기술적인 것들’이 없었다면,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얼굴조차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조언이라는 이름의 자기 연민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정말 걱정해서? 아니면 자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을, 그에 대한 질책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김경훈은 그의 떨리는 손끝을 느꼈다(물론, 상상 속에서). 젊은 시절, 그 역시 수많은 좌절과 타협을 겪었을 것이다. 거시적인 담론을 꿈꿨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루지 못한 꿈, 그가 지키지 못한 원칙들을, 그는 이제 다음 세대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실패한 인생의 책임을, 젊은이들의 나태함 탓으로 돌리려는 듯이.
이것은 비단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경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보 접근성’이라는 이름 아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어제저녁 보보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조차 그녀의 마음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남에게 요구하고, 자신이 지키지 못한 원칙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살아가는 모순적인 존재들이다.
탱고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낑낑거렸다. 마치 이 위선적인 대화를 이제 그만 끝내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4. 레퀴엠, 그리고 주석
김경훈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교수님의 깊은 뜻, 잘 새기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세상을 이해하고, 또 기여하는 방식이라 믿습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시대는 그렇게, 김경훈의 짧고 정중한 거절과 함께 조금 더 과거 속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회의실을 나왔을 때, 복도의 공기는 차갑고 신선했다. 김경훈은 탱고와 함께 천천히 걸으며, 아이폰을 꺼내 음성 메모를 시작했다.
‘제목: 늙은 신들의 레퀴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은 어쩌면 노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예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대신, 세상을 자신들의 낡은 규칙 안에 가두려 한다. 그들의 조언은 지혜가 아니라, 지나간 시대에 대한 뒤늦은 연가(戀歌)이자, 스스로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역시 미래의 어느 날,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는 늙은 신이 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노인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와 결핍을 타인에 대한 훈계로 포장하려는 내 안의 ‘늙음’이다.
결론: 모든 조언은 결국, 자기 고백이다. 그리고 모든 세대는 각자의 방식으로 길을 잃고, 또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지도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함께 걸어줄 동반자일지도 모른다.’
메모를 마친 김경훈은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탱고가 김경훈의 손을 핥았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물어가는 가을 햇살 속에서 늙은 신들의 쓸쓸한 레퀴엠을 들었고,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황혼을 예감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계속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김경훈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