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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들의 연금술

소쉬르의 시뉴(Signe) 이론

by 김경훈


우리는 사물(事物)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단단한 책상, 차가운 유리창, 따뜻한 커피잔. 그러나 정말 그럴까. 만약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붙인 이름표, 즉 ‘단어’라는 기호가 없다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사물의 숲이 아니라, 기호의 정글 속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모든 실재(實在)는 언어라는 연금술을 거쳐 비로소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그 연금술의 비밀을,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탐구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1. 기호의 무게


11월의 금요일 오후, 김경훈의 연구실은 늦가을의 낮은 햇살로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먼지와 오래된 책 냄새, 그리고 방금 내린 커피 향이 섞여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의 발치에는 안내견 탱고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자세로 엎드려 규칙적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아이폰 화면낭독기의 빠른 속도에 맞춰,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의 강의 노트를 다시 ‘듣고’ 있었다.


“왔어, 자기?”


보보의 목소리가 그의 집중을 깨뜨렸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가볍게 노크하는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백화점 로고가 찍힌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쇼핑백을 그의 책상 위에 가볍게 내려놓으며, 그의 뺨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오늘은 약간의 머스크 향이 섞인 장미 향이었다.


“이거 봐.” 그녀가 쇼핑백에서 매끄러운 가죽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완전 ‘명품’이지?”


김경훈은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연구실의 정적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와 함께, 지적인 호기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가 내민 가방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차가운 가죽의 질감, 꼼꼼한 바느질의 감촉, 그리고 묵직한 금속 장식의 무게.


“글쎄, 만져봐서는 이게 왜 ‘명품’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냥… 잘 만든 가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은데.”


보보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아이 참, 당신은 꼭 그렇게 초를 쳐요.” 그녀는 투덜거렸지만, 그의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철학 박사인 그녀 역시, 기호와 실재 사이의 간극에 대해 그와 밤새 토론하곤 했으니까.


“방금 소쉬르를 듣고 있었거든.” 김경훈이 말했다. 그는 아이폰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말했지. 언어는 기호(signe)라고. 그리고 기호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로 나뉜다고.”



2.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유희


그는 보보가 놓아둔 가방을 다시 한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명품’이라는 단어, 그 소리 자체는 그냥 ‘시니피앙’일 뿐이야. ‘명-품’. 아무 의미 없는 소리의 조합이지. 그런데 이 사회가 그 소리에 ‘비싸고, 희소하며, 과시적인 가치를 지닌 물건’이라는 ‘시니피에’, 즉 의미를 부여한 거야. 당신이 지금 흥분하는 건 이 가죽 덩어리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사회적 약속, 그 기호의 무게 때문이지.”


보보는 그의 옆에 걸터앉아, 흥미롭다는 듯 그의 설명을 들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당신 말은 이 가방이 그냥 비싼 가죽 쓰레기라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가방은 분명 훌륭한 물건이야. 하지만 ‘명품’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지금 당신이 느끼는 이 정도의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을 거라는 거지. 소쉬르는 말했잖아. 세상이 먼저 있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름을 붙임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존재하게 된다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경험을 덧붙였다.

“내 세계는 특히 더 그래. 나는 세상을 소리와 감촉, 냄새, 그리고 언어로 재구성하거든. 15년 동안 봤던 기억이 있지만, 그 기억을 현재의 감각과 연결해 주는 건 결국 ‘단어’야. 당신이 ‘저건 사과처럼 붉고 둥근 가로등이야’라고 말해주면, 내 머릿속에서는 ‘붉다’와 ‘둥글다’라는 기호에 연결된 수많은 기억 데이터들이 조합되면서 비로소 가로등의 이미지가 떠올라. 나에게 세상은 어쩌면 당신들보다 훨씬 더 언어적으로 구성된 세계인지도 몰라.”



3. 접근성이라는 기호의 배신


보보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당신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뭐야? 그것도 그냥 시니피앙일 뿐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이 순간 진지해졌다.

“그건… 가장 위험하고 아름다운 기호지.”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기의를 투영하는 가장 불안정한 시니피앙.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확인해야 하는 건지도 몰라. 당신이 말하는 ‘사랑’과 내가 느끼는 ‘사랑’이 같은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지.”


그는 다시 ‘정보 접근성’이라는 자신의 연구 주제로 돌아왔다.

“‘접근 가능(Accessible)’이라는 기호도 마찬가지야. 어떤 웹사이트에 ‘웹 접근성 인증 마크’라는 시니피앙이 붙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나 같은 사람에게 ‘장벽 없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상태’라는 시니피에를 보장하는 건 아니거든. 수없이 많은 사이트들이 그 기호 뒤에 숨어, 실제로는 접근 불가능한 정보를 방치하고 있어. 기호가 현실을 배신하는 거지. 내 연구는 어쩌면, 그 배신당한 기호들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작업일지도 몰라.”


4. 단어들의 연금술, 그 책임의 무게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연구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탱고가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며, 두 사람에게 저녁 산책 시간임을 알렸다.


김경훈은 보보가 사 온 ‘명품’ 가방을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그리고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단상을 음성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제목: 단어들의 연금술.

소쉬르는 옳았다. 우리는 언어라는 감옥의 죄수이자, 동시에 그 감옥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명품’, ‘접근성’, ‘사랑’. 이 단어들은 실재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실재를 창조하는 연금술사의 돌이다.

결론: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기표 하나가 누군가의 세계를 만들기도, 혹은 파괴하기도 하니까. 나의 연구 또한, 더 정의롭고 정직한 기호를 만들어내려는 하나의 작은 연금술일 뿐이다.’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단어라는 이름의 별들을 따라 길을 찾는 항해사였다. 그리고 그는 그 별들이 때로는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아는 외로운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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