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변증법(Hegel's Dialectic)
문제. 우리는 이 단어를 바이러스처럼 취급한다. 시스템에 침투하여 오류를 일으키고,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는 불청객. 그리하여 우리의 첫 번째 본능은 언제나 ‘제거’ 혹은 ‘회피’다. 문제를 지우고, 덮고, 외면함으로써 시스템의 안정성을 회복하려는 안간힘. 그러나 만약 그 문제야말로, 시스템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유일한 열쇠라면 어떨까. 독일의 늙은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그 역설적인 가능성을 속삭였다. 모순이야말로 성장의 자양분이라고. 이것은 그 불편한 진실을, 차가운 논리가 아닌 따뜻한 몸의 언어로 이해하게 된 어느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1. 안정된 세계의 균열
화요일 오후, 김경훈의 연구실은 익숙한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게 윙윙거리는 컴퓨터 팬 소리, 서류 더미에서 풍기는 마른 종이 냄새, 그리고 그의 발치에서 새근새근 잠든 안내견 탱고의 고른 숨소리. 그는 지금,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관 음성 안내 시스템의 사용자 피드백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였고, 시스템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듯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잘 정돈된 시스템을 바라보는 설계자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때, 그의 안정된 세계에 균열을 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나 완전 망했어.”
보보였다. 그녀는 노크와 거의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유쾌함 대신, 날카로운 좌절감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코트를 아무렇게나 벗어 의자에 던지고는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듯 몸을 기댔다. 그녀에게서는 늘 나던 섬세한 향수 냄새 대신, 차갑고 건조한 외부 공기의 냄새와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내 논문… 완전히 까였어. 심사위원 말이, 너무 ‘비주류’래.”
그녀는 칸트와 현대 기술 윤리를 접목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었다. 김경훈은 그녀의 연구가 얼마나 독창적이고 시의적절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계’라는 이름의 견고한 시스템은 때로 익숙하지 않은 새로움을 ‘문제’로 규정하곤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분노와 실망감으로 굳어 있었고, 평소 반짝이던 눈빛은 길을 잃은 듯 흐릿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래?” 김경훈이 부드럽게 물었다.
“뻔하지 뭐. 좀 더 ‘대중적인’ 주제를 다루거나, 아니면 분석 틀을 ‘주류’ 이론에 맞추거나. 결국 내 생각을 거세하라는 거잖아. 이게 학문이야, 아니면 자기 검열 대회야?” 그녀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탱고가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2. 헤겔이라는 이름의 해독제
김경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소쉬르의 기호 이론과 푸코의 권력 담론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분석이 아니라, 다른 관점, 즉 ‘해독제’였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 철학의 서랍에서 오래된 처방전 하나를 꺼냈다.
“보보.”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혹시 헤겔 기억나? 당신 전공은 아니었지만, 우리 가끔 얘기했었잖아. 변증법.”
보보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에 웬 헤겔이란 말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정(正)-반(反)-합(合). 테제-안티테제-진테제. 그 복잡한 거?”
“복잡하지 않아.”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그녀의 날카로운 신경을 조금쯤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핵심은 이거야. 어떤 ‘정립(테제)’된 상태, 예를 들어 ‘주류 학문’이라는 게 있다고 치자. 그런데 거기에 모순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반정립(안티테제)’이 나타나. 바로 당신의 ‘비주류’ 논문처럼.”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반’을 제거하려고 해. 당신의 심사위원들처럼 말이지. 그게 가장 쉽고 편하니까. 하지만 헤겔은 달라. 그는 이 ‘반’이야말로 시스템을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킬 열쇠라고 봤어. ‘정’과 ‘반’의 모순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그 둘을 모두 끌어안고 더 높은 차원에서 ‘종합(진테제)’하는 것. 그걸 ‘지양(Aufheben)’이라고 불렀지.”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장난기가 아닌, 진지한 설득의 빛이 감돌았다.
“당신의 논문이 ‘비주류’라는 건,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그게 핵심이야. 그 ‘비주류성’이야말로 당신 논문이 가진 가장 강력한 ‘반’의 에너지라고. 그걸 제거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걸 더 날카롭게 벼려서 기존의 ‘정’을 뒤흔들고 새로운 ‘합’을 만들어내야지. ‘비주류이기 때문에 더욱 희소가치가 있다’는 발상으로 전환하는 거야.”
3. 모순 속에서 길 찾기
보보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창밖의 희미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굳었던 표정이 서서히 풀리고, 그 자리에 깊은 생각에 잠긴 철학자의 얼굴이 돌아왔다.
“아우프헤벤….”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보존하면서 동시에 폐기하고,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김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당신의 독창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학계라는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증명하는 거지. ‘틈새시장’을 노리는 사업가처럼 말이야. 당신의 ‘비주류’가 왜 필요한지, 왜 가치 있는지를 설득하는 것. 그게 당신의 ‘진테제’가 될 거야.”
그는 자신의 연구를 떠올렸다. ‘정보 접근성’. 그것 역시 오랫동안 학계의 ‘비주류’였다. 기술적 문제, 혹은 소수의 장애인만을 위한 복지의 문제로 치부되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비주류성’ 속에서 ‘모두를 위한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발견했고, 기술과 인문학, 사회학을 넘나드는 새로운 ‘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연구 자체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이었다.
4. 긍정의 연금술, 그리고 주석
어느새 연구실 창밖으로는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보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피로감이 남아 있었지만, 이전의 날카로운 좌절감 대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자의 희미한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고마워, 자기.” 그녀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속삭였다. “당신은 꼭… 내가 잊고 있던 주문을 다시 가르쳐주는 마법사 같아.”
“마법사가 아니라 헤겔이지.” 그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떠난 후, 연구실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그것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충만한 침묵이었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대화와 사유를 음성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제목: 모순을 먹고 자라는 것들.
문제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통합의 대상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否定)을 통해 긍정(肯定)으로 나아가는 연금술이다. ‘정’에 안주하는 시스템은 결국 쇠퇴한다. ‘반’의 도전을 끌어안고 스스로를 파괴하며 재창조하는 시스템만이 살아남는다.
보보의 논문, 나의 연구, 어쩌면 삶 자체가 그러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모순과 문제 앞에서 좌절하지만, 바로 그 균열 속에서 성장의 기회를 발견한다.
결론: 불가능은 없다. 단지 우리가 아직 ‘아우프헤벤’할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모든 ‘반’은 새로운 ‘합’의 씨앗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모순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내려놓았다. 발치에서 그의 평온함을 느낀 탱고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창밖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능성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세상은 여전히 문제투성이였지만, 이제 그는 그 문제들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