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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따구는 괜찮아

저를 북으로 보내주십시오, feat. 마봉 드 포레

by 김경훈


불안. 그것은 현대인의 영혼에 달라붙은 보이지 않는 깔따구 떼와 같다. 우리는 그것을 떨쳐내려 안간힘을 쓰지만, 불안은 끈질기게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든다. 테러리스트의 총구, 바이러스의 현미경 사진, 주식 시장의 급락 그래프. 미디어는 불안을 먹고 자라며, 우리는 그 불안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로, 합리적인 계산 대신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더 안전해 보이는 곳, 더 조용해 보이는 곳, ‘북쪽’이라는 막연한 이름의 피난처를 향해. 이것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한 여자와, 그 도피의 기록을 다른 감각으로 읽어낸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1. 불안의 전조


11월의 차가운 비가 연구실 창문을 두드리는 오후였다. 김경훈은 아이폰 화면낭독기의 빠른 속도에 맞춰, ‘마봉 드 포레’라는 작가가 쓴 칼럼을 ‘듣고’ 있었다. 그녀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와 날카로운 관찰력이 담긴 글이었다. 주제는 런던행 A380 비행기 탑승기부터 시작해, 느닷없이 스코틀랜드로의 ‘엑소더스’로 끝나는 기묘한 여행담이었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빗소리와 탱고의 낮은 숨소리만이 존재하던 연구실의 정적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 위로, 그녀의 글이 불러일으킨 흥미와 공감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글 속에서 단순한 여행 정보가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불안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마침 다음 주, 그는 내년 3월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정보 접근성 관련 국제 학회 참석 건으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학회 자체보다, ‘스코틀랜드’라는 낯선 공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함께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2. 고래 혹은 이층 버스


약속 장소는 동성로의 오래된 LP 바였다. 짙은 나무색 인테리어와 희미한 조명, 공기 중에 떠도는 위스키와 시가 향,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LP 재킷들. 김경훈은 이 공간의 아날로그적인 질감을 좋아했다. 마봉 드 포레는 이미 바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얼음이 담긴 잔을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가죽 재킷에 헐렁한 밴드 티셔츠 차림이었고, 짧게 자른 머리는 여전히 반항적인 기운을 풍겼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을 달관한 듯한 피로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호기심이 공존했다.


“그래서 내 글은 좀 읽어봤어요, 작가님?” 그녀가 물었다. 바삭거리는 목소리 톤은 여전했다.


“네,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김경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특히 A380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더군요. ‘하늘을 나는 이층 버스’ 혹은 ‘향유고래’라… 제 기억 속의 비행기는 대부분 날치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그는 15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공항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실제로 보면 입 딱 벌어져요.” 그녀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그 쇳덩이가 활주로 끝에서 하늘로 떠오르는 걸 보면, 인간의 오만함과 위대함에 대해 동시에 생각하게 되죠. ‘와 스발 저게 뜨냐?’ 싶다가도, 뜨고 나면 그 안에서 주는 땅콩에 목숨 거는 게 또 인간이고.”


그녀는 항공사 직원으로서 겪었던 ‘천것’의 설움, 등받이 고장 난 좌석에 대한 체념, 그리고 기내 엔터테인먼트로 시간을 죽였던 이야기를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로 풀어냈다. 김경훈은 그녀의 목소리 톤과 단어 선택, 그 안에 담긴 자조적인 위트를 통해, 그녀가 겪었을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3. 프로토콜과 패닉 사이


“영국 입국 심사 때가 압권이었습니다.” 김경훈이 말하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거요? 진짜 만반의 준비를 했거든요. 엑셀 파일에 여행 일정 짜고, 에든버러 페스티벌 예약증까지 프린트해서 클리어 파일에 딱! 혹시라도 불법체류자로 오인받을까 봐.”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서류를 내미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심사관은 ‘홀리데이?’ 묻고는 내가 ‘홀…’ 하는 순간 이미 도장을 쾅! 찍고 다음 사람 부르고 있더라니까요. 허무했죠. 내가 그렇게나 모범 시민처럼 보였나 싶기도 하고.”


김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작가님은 시스템(입국 심사)이 요구할 거라고 예상되는 모든 데이터를 준비했지만, 정작 시스템은 작가님의 외양(Appearance)이라는 가장 단순한 메타데이터만으로 ‘정상’ 혹은 ‘안전’이라고 판단하고 통과시킨 거죠. 때로는 가장 복잡한 프로토콜보다, 가장 단순한 휴리스틱이 더 강력하게 작동하기도 합니다.”


“휴리스틱이고 나발이고,” 그녀가 말을 잘랐다. “진짜 패닉은 다음 날 아침에 찾아왔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눈빛의 장난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날의 충격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그녀는 런던의 싸구려 지하 숙소 식당에서 TV 뉴스를 통해 접했던 니스 트럭 테러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화면 속의 아비규환, 사망자 숫자, 그리고 자신이 불과 얼마 전에 걸었던 ‘영국인의 거리’라는 익숙한 장소의 이름.


“갑자기 런던이 너무 무서워졌어요. 그 복잡한 지하철, 수많은 인파… 어디서든 다음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 머리로는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싶으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예요.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4. 북쪽이라는 이름의 판타지


“그래서… 북으로 가셨군요.” 김경훈이 조용히 말했다.


“네. 북으로!” 그녀는 마치 구호처럼 외쳤다. “스코틀랜드. 거긴 런던보다 사람이 적으니까, 테러리스트도 거길 노리진 않을 거라는 아주 비합리적인 계산이었죠. 7월의 하이랜드는 깔따구(Midge) 지옥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무작정 북쪽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어요. 테러리스트보다는 차라리 깔따구가 낫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유스턴 역에서 맛없었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꾸역꾸역 먹고, 글래스고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 순간을 회상했다. 그리고 프레스턴을 지날 무렵, 안내 방송을 하던 기관사의 목소리가 잉글랜드 억양에서 찐한 스코티시 억양으로 바뀌었던 그 순간.


“‘원 떼얼티(One Thirty)’. 그 투박하고 정감 넘치는 발음을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예요. 내가 지금 안전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안도감? 아니면 그냥 그 억양 자체가 주는 이상한 위안? 모르겠어요. 그냥…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어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인데도.”


그녀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마저 비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날의 감동과 함께,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어이없었다는 듯한 쑥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5. 불안의 접근성, 그리고 주석


김경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가 단순히 한 개인의 해프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보 과잉 시대의 불안이 어떻게 개인의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때로는 가장 비논리적인 선택으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미디어는 테러라는 극단적인 사건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증폭시키고, 개인은 그 이미지에 압도당해 실제 위험 확률과는 무관하게 극단적인 공포를 느낀다. 안전한 장소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고, 위험에 대한 정보는 과잉 공급되는 불균형. 이것 역시 ‘정보 접근성’의 문제였다.


그는 아이폰을 꺼내, 그녀의 허락을 구하고 짧게 음성 메모를 남겼다. 그의 유쾌한 목소리 톤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시대의 불안에 대한 그의 냉철한 분석이 담겨 있었다.



‘제목: 깔따구는 괜찮아 - 불안 접근성에 대한 단상.

마봉 드 포레의 엑소더스는 현대인의 불안 작동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미디어가 증폭시킨 위험 정보(테러)는 실제 확률과 무관하게 개인의 감각 시스템을 압도한다. 안전 정보의 부재 혹은 불확실성은 합리적 판단 대신, ‘북쪽’이라는 막연한 상징적 피난처를 향한 비합리적 이동을 촉발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스코티시 억양’이라는 비정형적이고 감성적인 데이터가 그녀에게 강력한 ‘안전 신호’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결론: 불안은 정보 접근성의 불균형 속에서 증폭된다. 때로는 가장 이성적인 데이터보다, 가장 감성적인 ‘억양’ 하나가 우리를 구원하기도 한다. 어쩌면 에든버러 학회에서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딱딱한 논문 데이터가 아니라 그 도시의 ‘억양’일지도 모르겠다. 깔따기는… 글쎄,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다.’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내려놓았다. 마봉 드 포레가 그의 마지막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깔따구요? 그거 진짜 장난 아니에요. 방충망 없으면 사람 미쳐요.”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김경훈은 그녀의 걱정이 고마워, 활짝 웃었다. 어쩌면 세상은 테러리스트와 깔따구 사이의 어딘가에서 서로의 불안을 나누고 위로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곳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참고문헌

https://brunch.co.kr/@mabon-de-foret/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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