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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보다는 깔따구가 낫다

저를 북으로 보내주십시오!

by 마봉 드 포레

에어버스 A380 - 하늘을 나는 이층버스

7월 14일에 출발한 이유는 그날이 딱히 길일이어서가 아니라, 그날 전후로 비행기에 빈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20일경부터는 본격적으로 성수기 돌입이라 20일 전에는 무조건 출발해야 했다.


다행히 탑승권은 바로 나왔다. 안 좋은 자리(가운데 끼는 자리)였지만 상관없었다. 서서 가는 거만 아니면 됐지 뭐. 원래 항공사 직원들은 남는 자리 타고 가는 천것들이라 앞좌석 선반이 부서지거나 팔걸이가 떨어진 자리 같은 것도 감사하게 받는다. 아 밥은 무릎에 놓고 먹으면 되고(밥 모자란다고 못 얻어먹은 적도 있는데, 주시기만 해도 감사하다), 팔걸이가 없으면 무릎에 공손하게 손 얹고 가면 되지.


런던행 비행기는 A380. 실제 타보는 건 처음이라 설렜다. 잠시 에어버스 380(A380)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자.

정식 이름: Airbus A380-800
최초 비행: 2005년 4월
운항 시작: 2007년 (싱가포르항공이 첫 고객)
엔진: 롤스로이스 Trent 900 또는 엔진 얼라이언스 GP7200
좌석 수: 항공사 구성에 따라 약 450~850석
항속 거리: 약 15,000km (대륙 간 직항 가능)

특징:
세계 최초의 전 좌석 2 층형 여객기 (이층버스처럼 생김)
이륙 중량(MTOW) 560톤 이상, 공항 활주로를 따로 보강해야 할 정도로 큼
비행 중 진동이 적고 조용해서 승객 만족도 높음
연료 소모가 많고 유지비가 커서 항공사 입장에서는 효율이 떨어짐
최근에는 연료 효율 좋은 쌍발기(A350, B787) 중심으로 바뀌면서 단종(2021년 생산 종료) 되었다.
현재는 에미레이트항공(EK)이 대표적으로 계속 운영 중이다.
에미레이트항공의 A380-800 이륙 모습. 사진출처: https://aircraftwallpapergalleries.blogspot.com/
2025년 현재 대세인 보잉 787 드림라이너.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

아무리 요새 B787(드림라이너)이 대세라 해도 일반 승객 입장으로 보면 크기도 무지막지하게 크고 거대한 이층버스 같은 A380이 그냥 봐도 입이 떡 벌어지게 멋있다. 공항에서 비행기들 이륙하는 거 지켜보면, 멸치 혹은 잘 봐줘야 날치 같은 B737(저비용 항공사들 주력 기종)들이 표로롱! 하고 날아오르는거 보다가 육중하고 거대한 향유고래 같은 A380이 활주로에 서면 "와 시발 저게 뜨냐? 뜨냐? 우오오오시발 뜬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층에 타고 싶지만, 이층은 전 좌석 비즈니스라 어차피 못 들어간다(ㅜㅜ 더러운 계급사회). 자, 드디어 출발한다. 육중한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른다. 인천공항, 영종도, 시화호 등등등을 뒤로하고 비행기는 런던으로 향했다. 감격에 뻐렁친다. 나는 이제부터 외로운 여행객, 자유의 방랑자,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은 백수다.


기내에서

조금 후, 옆자리 복도 측에 앉은 아저씨가 자리를 옮겼다. 등받이 넘기는 버튼이 빠져 있어서 등받이가 안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엔 내가 앉았다. 이제 나는 창가 쪽 아줌마와 가운데 빈자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편하게 앉아가게 되었다. 등받이가 안 넘어가지만 상관없다. 나의 굳은 지조와 절개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꼿꼿하게 앉아가면 된다.


길고 긴 비행시간 동안 기내 엔터테인먼트로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 1953)'를 봤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잉그리드 버그만인 줄 알았는데 오늘부로 데보라 카로 바뀌었다. 스코틀랜드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이 하와이인데, 하와이를 폭격한 나쁜 일본군! 밉다! 일장기 그려진 폭격기가 나타났을 때는 진짜로 소리 지를 뻔했다.


오래 앉아있으니 허리 쑤시고 다리 부어서 비행기 뒤쪽 갤리까지 왔다 갔다 하다가, 2층 올라가는 계단도 한번 야속하게 쳐다보고(*올라가면 안 된다), 면세품 전시코너도 구경하고, 바구니에 담아 승객들 먹으라고 둔 다임 초코렛도 까먹고, 화장실 들어가서 참존 에센스도 발라보고 하면서 긴 비행시간을 견뎠다.


영국 입국

드디어 런던 히드로 도착. 입국심사 줄에 섰다. 나는 여행 준비를 하면서 혼자 여행 온 여자들 중 영국 입국 심사 때 "여행을 4개월이나 하는데 현금 가져온 게 겨우 그거밖에 없어?"와 같은 의심을 받아 입국 거절되었다는 후기를 보고, 내가 진짜 여행하러 온 사람이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것은 바로...


1. 여행 일정과 목적지, 미리 예약한 숙소를 적은 엑셀 파일(P에게 이 정도면 천지개벽)

2.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미리 예약한 공연 예약증 프린트한 것

3. 항공권 전자 티켓과 브리티시 레일 패스

등등을 얇은 클리어파일에 넣어두고 의심받는 것 같으면 보여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국심사 줄은 무지하게 길었다. 인도 사람들이 어찌나 새치기를 하고 앞으로 보내달라고 뒤에서 쿡쿡 찔러대는지 짜증 나서 그냥 몇 명 보내줬다. 뒤에 선 한국 사람들도 "야야 짜증 난다, 보내줘 보내줘." 하는 걸 들으니 다들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인종차별 국적차별 하긴 싫고 우리도 똑같은 편견에 피해를 보고 있긴 하지만,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질서고 나발이고 너무 이기적이어서 질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클리어파일을 손에 들고 조마조마하며 입국 심사관에게 갔다.

"비즈니스? 홀리데이?"

"홀..."

"OK! 해브어굿트립!"


내가 "홀..." 까지만 했는데 그는 이미 내 여권에 도장을 찍고 다음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난 그냥 봐도 불법체류 안 하게 생겼나 보다.

정성 들여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지 못해 좀 아쉬웠다.

그 이후 여행 내내, 클리어파일은 짐만 되었다.


참고로, 지금은 영국 입국 시 한국, 일본 등 무사증 협약 된 국가들은 입국심사대 들를 것도 없이 자동심사대만 통과하면 바로 나갈 수 있다. 3년 후 런던 출장 갔을 때 자동심사대 이용 가능 국가에 태극기 붙어있어서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런던의 공기는 서늘했다. 출발할 때 한국은 내가 사람인가 찜통 속의 만두인가 싶을 정도로 푹푹 쪘는데... 런던은 아침저녁 긴팔 입어야 할 날씨였다.


인천공항에서 탑승권 받고 비행기 타러 가는 길에 예약한(오늘 비행기 타게 될지 확실치 않아 미리 예약을 할 수가 없었다) 런던 숙소는 패딩턴역 근처에 있었다. 싸지도 않은 숙소가 뭐 이리 후졌는지. 이런 방에 비하면 우리나라 찜질방은 얼마나 훌륭한 숙박시설인지 모른다. 습습한 공기, 축축한 벽, 슬리퍼도 없고(그럴까 봐 싸왔다) 옷장엔 옷걸이도 없음(접는 옷걸이도 싸왔다 - 맥시멀리스트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다). 내 방은 개인실이라 지하였는데 계단을 몇 개나 내려가야 겨우 나오는 감옥 독방 같은 곳이었다. 이 건물에 불나면 틀림없이 일빠로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만 묵으면 되니까 참았다.


북으로 보내주십시오!

다음날 아침, 커피라도 한잔 마실까 하고 게스트하우스 부엌 겸 식당에 간 나는 TV를 보고 깜짝 놀랐다. 프랑스 니스(Nice)에서 테러가 난 것이었다. 니스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향해 대형 트럭이 고속으로 질주하여 사망자가 86명, 부상자도 무려 450명 이상 나온 충격적인 테러였다(2016.07.14 니스 트럭 테러 사건).

테러가 벌어진 길은 '영국인 거리(Promenade des Anglais)'라는 곳으로 니스 사진에 대표적으로 나오는 해안 산책로였다. 그 휴양지에서 어떻게 테러를...! 심지어 예전에 (출장으로) 가봤기 때문에 아는 곳이라 더 끔찍했다.


갑자기 나는 사람이 많은 런던이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빨리 북으로(부칸 아님) 올라가자. 사람 적은 곳으로... 테러리스트도 사람 많은 곳을 노리니까, 산동네로 가면 안전할 거야.'


7월, 여름의 하이랜드는 무서운 깔따구들이 한창인 시즌이었다. 그래도 테러리스트보다는 깔따구가 나은 법이다. 원래 계획은 런던에서 구경도 좀 하다가 오늘 오후나 내일쯤 스코틀랜드로 가려고 했는데, 이젠 다 필요 없고 당장 위쪽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니스 테러가 좀 충격적이기도 했고, 숙소며 패딩턴 근처가 너무 울적해서 더 있고 싶지가 않기도 했다.

유스턴 역에서 먹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베이크드 빈, 토스트 브레드, 베이컨, 소시지(빵에 가려 잘 안 보임), 서니사이드 업 계란후라이 그리고 커피. 맛없었다.

나는 즉시 짐을 챙겨 유스턴(Euston) 역으로 갔다. 그래도 영국에 왔으니 역에 있는 식당에서 첫 끼니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한 접시 때리고, 9:30 출발 기차를 탔다.


유스턴에서 글라스고까지는 기차로 네 시간 반. 프레스턴(Preston)에서는 기관사가 교체된 모양인지 열차 안내방송이 스코틀랜드 악센트 찐한 아저씨 목소리로 바뀌었다. 글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 교체 전(잉글랜드 사람): 글라스고 센트럴 도착 시간은 원 써티, 원 써티

● 교체 후(저글링 하면서 들어도 찐한 스코티쉬): 글라스고 센트럴 도착 시간은 원 떼얼티, 원 떼얼티

(이 방송 녹음한 녹음파일이 있었는데 잃어버려서 안타깝다)


아,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이 수더분하고 정감이 넘치는 스코티시 악센트...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는 마치 고향 사투리를 듣고 감동에 뻐렁치는 사람처럼 이 안내방송에 눈물을 흘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과 호수의 풍경이 점점 거칠고 드라마틱해졌다. 기차는 글라스고 센트럴 역으로 들어섰다. 나는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글라스고 센트럴 역 실내 전경. 유리 지붕 아래 행선지 표지판과 네 방향 시계가 걸려 있고, 역 안에는 여행객들이 붐비고 있다
오늘의 이동 경로: 런던에서 글라스고(650km). 서울-부산의 약 1.6배. 지도출처 Google Maps

• 이딴 글에서조차 영감을 받아 인간의 불안과 선택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을 하시는 김경훈(필명 김탱고) 작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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