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대학 기숙사와 함께

또한 독한 감기와 함께

by 마봉 드 포레

스코틀랜드의 여름은 너무 추웠다

글라스고 기차역에 내리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뭐 이건 영국에 온 이상 디폴트다), 코트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 가족 단톡방에서는 날이 푹푹 찐다, 더워 죽네, 같은 말들이 올라오고 있는데, 거기다가 나는 "여기 너무 춥다..."라는 말을 달아야 했다. 계절 거꾸로인 남반구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뭔 일이람.


당시 글라스고의 '낮' 기온은 15도, 비 오고 바람 불면 체감온도는 10도 안팎까지 떨어지는, 우리나라 11월 초 정도의 날씨였다. 이렇게까지 추울 줄 알았더라면 정말 따뜻한 옷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나는 암만 그래도 7-8월에 여행하는데 맨투맨에 바람막이면 되겠지 하고 짐을 싸왔던 것이다.


맥시멀리스트 챔피언으로서 짐을 더 싸고 싶어도 참아야만 하는 고통을 견디며 그렇게 꼭 필요한 것들만 골라 짐을 쌌는데, 막상 와보니 내가 가져온 건 그다지 쓸모가 없었고 오히려 거기서 옷을 사야만 했다. 다행히도 글라스고는 큰 도시이므로 쇼핑할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맘 놓고 막 살 수가 없는 것이, 가방 무게를 20kg 전후로 유지해야 했다.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 산 옷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짐을 뒤져서 정말 여행기간 동안 쓸모없을 것 같은 것들을 빼서 집으로 부쳤다. 우편 요금 비싸니까 배편으로. 어차피 나는 두 달 후에나 집에 도착할 테니까.


그때 집으로 보낸 것은 여름 티, 반바지, 선글라스 등, 이놈의 동네 날씨 대충 보아하니 절대로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아이템들이었다. 선글라스는 솔직히 보내기 직전까지 망설였다. 영국이 아무리 허구한 날 비 오고 흐려도, 해 쨍쨍한 날이 있긴 하니까. 갈팡질팡 갈등하다가 그냥 에라 눈부시면 모자 쓰지 뭐! 하고 보내버렸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여행 내내 해가 비치는 날이 정말 며칠 안되었던 것이다(눈물이 앞을 가림).

글라스고의 숙소에서 찍은 사진. 별건 없는데 건물 사이로 보이는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 너무 신기(?)해서 찍었다.

평화가 대학 기숙사와 함께, 또한 독한 감기와 함께

내가 들어간 숙소는 글라스고 대학 기숙사 건물을 방학 동안 유스호스텔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장점은 깨끗하고, 위치도 좋고, 학생들이 살던 데라 주변도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단점은, 방이 소박하고 정갈하다 못해 아무것도 없었다. 아래 사진이 내가 묵었던 방이다. 학생들이 기숙사에 들어가면 벽에다가 포스터니 뭐니 온갖 지가 좋아하는 괴랄한 것들로 도배해 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침대, 책상, 작은 옷장, 벽에는 대형 보드 게시판이 전부인 소박한 글라스고의 대학 기숙사

2000년, 에딘버러에서 지낼 때, 월세방 계약기간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머무를 곳이 필요했다. 그때 학교 기숙사에서 살던 스웨덴 여자애가 당시 에딘버러 최고의 클럽 '프랑켄슈타인(이곳 얘기는 나중에 또 하겠다)'에서 알바를 하다가 거기서 일하던 놈과 눈이 맞아 그놈 집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걔 방이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애한테 좋은 술(학생 딴에 살 수 있는) 한 병을 사주고 그 방에 들어가 지냈다. 그 방도 이 글라스고 대학 기숙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나도 20대였는데, 이제 40이 다 돼 갖고 이런 방에 들어오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만 같고 기분이 괜히 좋았다.


그러나, 기분 좋은 것도 잠시였다. 갑자기 너무 추운 동네에 와서 비까지 맞아서 그런가, 아직 진짜로 추운 동네(하이랜드와 도서 지역) 근처도 못 갔는데 스코틀랜드 도착하자마자 감기, 그것도 아주 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목 코 다 아프고 열도 나기 시작했다. 겨우 가방으로 기어가서(저 좁은 방에서 캐리어 가방까지 가는 것도 힘들 정도로 아팠다) 강서구청 사거리의 독한 약 지어주기로 이름난 병원약을 꺼냈다. 그 병원에서 처방받으면 기본이 한 줌이었다. 웬만한 감기도 그 병원 다녀오면 나았다. 그런데 이번 감기는 그 약을 먹고도 낫지를 않았다.


7월 16일. 여행 3일째. 아침에 일어나자 목이 부어서 아예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한 점은 어차피 영어로는 할 말도 없다는 것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가져온 옷을 죄다 껴입고(아직 글라스고 쇼핑 전이라 가진 옷이 다 얇았다) 죽지 않기 위해 아침을 먹으러 갔다. 부부가 하는 아늑한 카페에서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다. 시부엉 이 동네 왜 국밥 안 팔아. 목이 찢어질 것 같은데 프렌치토스트가 웬 말이냐. 주인장 어머니인 듯한 할머니가 뭔가 도와주고 싶은지 말을 시키는데 BBC 아나운서처럼 말해도 알아듣기 힘든데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너무 찐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관광객답게 환한 미소로 답해 드렸다.

글라스고 중심가 뷰캐넌 스트리트의 풍경. 시계탑 건물과 붉은 석조 건물들 사이로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

뷰캐넌 스트리트에서 킬트 차려입은 아저씨가 백파이프를 불고 있었다. 그 옆에서 거지 넝마 같은 옷을 입은 아저씨 둘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건물 입구 계단에 앉은 홈리스가 처량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아, 진짜로 돌아왔구나, 스코틀랜드에.


아파서 죽을 것 같지만 오늘로 로밍이 끝나기 때문에 포켓 와이파이 사러 쇼핑몰로 들어갔다. 내가 사랑하는 옷 브랜드 넥스트(Next)가 섬머 세일 중이었다. 여자들이 여름옷을 미친 듯이 주워 담고 있었다. 대체 쟤네들은 저런 옷을 일 년 중 며칠이나 입을까? 여름이 며칠이나 된다고. 난 저런 거 말고 가볍고 방수되는 패딩 같은 게 필요한데, 사기도 아까운 것이 나 그런 거 집에 디따 많은데, 아이고 집에 있는 내 패딩, 내복, 핫팩, 그냥 다 가져올걸.


스코틀랜드의 국민 음료, 아이언 브루(Irn-Bru)

7월 17일. 여행 4일째(14일 날 인천공항 출발함).

전날 먹은 프렌치토스트 이후 먹은 거라곤 부엌에 있는 홍차, 아이언 브루, 스트렙실뿐이었다. 밤새도록 기관지가 터지도록 기침을 하며 끙끙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잠깐 여기서 스코틀랜드의 국민 음료 아이언 브루(Irn-Bru)에 대해서 알아보자. 한국에 오면 식혜, 아침햇살, 솔의 눈(? 이건 한국사람들도 안 마셔본 사람 많다)을 알아야 하듯이, 스코틀랜드에 가면 이 음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형광 주황색 액체가 든 아이언 브루. 사진출처 https://www.thescottishsun.co.uk

● 이름: 아이언 브루(Irn-Bru) - 이름과는 달리 철분 주스는 아니다

● 원산지: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근처

● 제조사: A.G. Barr plc (1901년부터 생산)

● 색깔: 형광 오렌지(미에로화이바보다 조금 진한 색깔)

● 맛: 환타 + 박카스 + 껌 + 감기약 시럽? 미에로화이바보다 더 인공 단맛 느껴짐. 우엥 이게 뭐지? 하고 몇 번 마셔보면 중독된다.

● 스코틀랜드 제2의 국민 음료(제1은 당연히 위스키). 숙취해소로도 좋다.


예전에 에딘버러 살 때도 쟁여놓고 먹었다. 이번에도 이걸 먹고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앓다가 일어나 비척비척 일어나 밥을 먹으러 갔다. 춥지도 않은지 민소매에 반바지 입고 마라톤을 뛰는 한 무더기의 인간들과 나처럼 있는 옷 죄다 껴입고 어깨를 움츠린 관광객들이 뒤섞인 거리를 지나 러시아 식당에 들어갔다. 예쁜 언니가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억양이 들어간 영어로 주문을 받았다. 러시아 수프 보르시치(Borscht / Борщ)를 한 숟갈 뜨니 몸이 따뜻해졌다. 감기가 드니 역시 국물 있는 음식이 맛있었다. 컵라면 사올걸 흑흑. 짐 부피 늘어날까 봐 안 갖고 왔는데 그거 하나 먹으면 나을 것 같은데 아 그 컵라면 한 개가 없어서 이러고 있네...

이름은 까먹은, 트론게이트(Trongate) 근처의 러시아 식당. 러시아 소품들로 장식된 실내.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러시아식 허브 레몬티 - 보르시치 - 메도로이크(러시아 꿀케이크) - 블리니(속에 고기, 감자, 버섯 등을 넣고 크레페로 돌돌 말은 러시아식 팬케이크

그래도 어차피 추운 동네에 온 이상 감기 한번 정도 걸릴 각오는 하고 왔는데, 이왕 걸릴 거라면 글라스고에서 걸리는 게 나았다. 나중에 하이랜드 시골이나 섬에 들어가서 아프면 대책없다. 그나마 여긴 가게도 많고, 병원도 있고, 드럭스토어도 있으니까.


다행히도, 이때 감기 걸린 이후 여행 끝날 때까지 한번도 아프지 않았다. 액땜? 매도 먼저 맞기? 아무튼 지독하게 아팠지만, 그게 끝이었다(스포!).

글라스고 조지 스퀘어(George Square) 현대미술관(GOMA, Gallery of Modern Art) 근처. 코스타 커피(Costa Coffee) 가 우측에 보인다.

러시아 식당을 나와 가게에 들러 마실 거랑 귤 한봉지를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아프니 한 일이 하나도 없네. 아무리 게으른 여행이 목적이었지만 첫날은 영국 입국, 둘째날은 글라스고 도착, 세째날은 프렌치토스트, 네째날은 러시아 식당 간 게 전부였다. 여행 일정 빡빡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글라스고 관광 끝내고 다음날 다른 데로 이동했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백수, 시간이 남아 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면 되는, 한가한 백수.


행복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외국의 카페에서 비 오는 거리 구경이나 하며 커피나 홀짝이는 자유로움. 이것을 위해 나는 여기에 왔다 - 라고 말은 해도 어쨌든 아픈 건 좀 힘들었다. 이거만 나아 봐. 아주 그냥 글라스고 쇼핑몰을 탈탈 털어 버릴 테다(결국은 쇼핑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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