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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다아시를 찾아 라임 파크로

I admire and love you, so ardently.

by 마봉 드 포레

올라왔는데, 도로 내려간다

7월 18일. 여행 5일째.

날씨가 무지 따뜻하다. 아침부터 무려 14도!(쪄 죽네 쪄 죽어)나 되는 이 따뜻함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오늘은 이 따뜻한 날씨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디즐리(Disley)의 라임 파크(Lyme Park)에 다녀오기로 했다. 글라스고에서 편도 4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위쪽이 아니고 아래쪽으로.


그럼 런던에서 올라오는 길에 들르지 않고 뭐 하러 글라스고까지 와서 도로 내려가는가?


그걸 알면 내가 P가 아니지.


사실 이유는 이랬다. 내가 스코틀랜드 여행을 계획할 때 스코틀랜드 외 지역에서 딱 두 군데 여기만은 가야지! 하고 동그라미 쳐놓은 곳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1995년 BBC 6부작 시리즈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에서 미스터 다아시의 저택인 펨벌리(Pemberly)의 촬영 장소인 라임 파크이고, 또 하나는 출발하기 직전에 본 영화인 미 비포 유(Me Before You)에 나오는 펨브로크 성(Pembroke Castle)이었다. 그런데 펨브로크셔는 웨일스, 그중에서도 끄트머리라 동선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펨브로크 성은 포기하고 라임 파크만 가기로 했다(지금까지도 못 갔으니 그때 갔었어야 했나 생각도 든다).


물론! 라임 파크도 런던에서 글라스고 가는 길에 들렀으면 딱 좋은 동선이었다. 대충 중간쯤 있으니까. 나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글라스고로 갔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라임 파크에 가려면 런던 - 글라스고 가는 길에 맨체스터나 벅스턴(Buxton)에서 1박을 해야 했는데, 벅스턴은 너무 작은 동네라 방이 없었고, 맨체스터에는 묵기 싫었다.


2. 벅스턴에 방이 있었다 할지라도, 21kg짜리 짐을 가지고 작은 기차로 옮겨 다니며 거기까지 가기 싫었다 그냥 한 장소에 짐 풀고 편하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3. 8월 14일에 유효기간이 만료되는 브리시티 레일 패스를 알차게 이용하고 싶었다(거리에 상관없이 날짜단위 이용이라 장거리 이용할수록 뽕 뽑는다).


4.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사실 나... 기차 좋아한다. 기차 환승은 더더욱 좋아한다. 런던 유스턴 - 글라스고 같은 급행열차 말고 지방열차 타는 거 억세게 좋아한다(일본에서도 일본 노인네들과 같이 관광열차 타고 계곡 관광 다녀온 사람임). 글라스고 - 디즐리는 환승을 무려 두! 번!이나 해야 하는 코스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나는 이미 콧김을 내뿜으며 결심했다. 여긴 반드시 글라스고에서 기차 타고 간다,라고.


더 위쪽으로 올라가기 전에 라임 파크를 가야 하는데, 그날 일어났더니 날씨가 너무 좋길래 오늘이 길일이다! 하고 바로 기차를 타러 갔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오! 일어났더니 날씨가 참 좋네! 오늘은 지하철 타고 한강 공원이나 다녀올까?" 같은 느낌으로 들리는데, 글라스고 - 디즐리는 무려 372km이다(대략 부산 - 개성 거리에 해당한다. 서울 - 부산 직선거리가 320km). 아침에 일어나서 손가방 하나 챙겨갖고 훌쩍 떠나기에는 상당한 거리였다.


불멸의 명작, 1995년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1995년작 BBC 드라마 6부작 오만과 편견에 대해서 알아보자! 2005년 키이라 나이틀리 출연의 영화 오만과 편견 때문에 이제는 오만과 편견 하면 그쪽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는데, 사실 그 영화는 쓰레기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4편이나 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렇다면 1995년의 BBC 드라마는 어땠는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트레일러부터 보자!

동영상 출처 : 유튜브 British Secret Agent 007

BBC 〈Pride and Prejudice〉 (1995)

● 제목: Pride and Prejudice (오만과 편견)

● 방영: 1995년 9월 24일 ~ 10월 29일

● 방송사: BBC One

● 형식: 미니시리즈 (총 6부작)

● 감독: 사이먼 랭턴 (Simon Langton)

● 원작: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813년 소설)

● 출연진

콜린 퍼스 (Colin Firth) - 미스터 다아시 (Mr. Darcy) 역

- 원래도 유명했지만 이 드라마로 영원한 전설이 되셨다.

제니퍼 엘 (Jennifer Ehle) - 엘리자베스 베넷 (Elizabeth Bennet) 역

- 지적이고 아름다운 엘리자베스 역인데 남주가 너무 도라버린 미모라 살짝 후달렸다. 그리고 어차피! 영국 드라마나 영국 영화에 예쁜 여자는 안 나온다. 솔직히 잘생긴 남자도 안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콜린 퍼스, 휴 그랜트, 제임스 맥어보이, 이완 맥그리거 같은 잘생긴 영국 남자는 영국에서 도도새급 멸종위기 생물이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다른 영화나 드라마 보면 남주 여주 다 눈물이 날 정도로 못생긴 사람들만 나온다. 그냥 참고 봐야 한다.

앨리슨 스테드먼(Alison Steadman) - 베넷 부인 역

- 인류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이 사람보다 더 베넷 부인 역할 잘 한 사람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징 / 평가

● BBC 특유의 세밀한 시대고증 (복식, 대사, 예절, 사회계급 묘사 완벽)

- 2005년 영화는 이 방면에서 진짜 개쓰레기임

● 원작을 최대한 살린 대사와 장면들

- 2005년 영화는 원작은 테마만 갖다 쓰고 그냥 새로 창조함

● 전설의 명장면

- 콜린 퍼스가 호수에서 젖은 셔츠 차림으로 나오는 ‘Darcy’s lake scene’ 이 영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힘(실제로 라임 파크에 가면 미스터 다아시 호수(Mr. Darcy's Lake)가 있음).

● 이 드라마 마지막 회 방영 때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는 전설이 있음.

- 사실임. 나 이때도 영국에 있었음. 현지인들은 진짜로 밖에 한 명도 안 돌아다님.

● '다아시 신드롬'이 생겼고, 수많은 패러디물이 생산되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도 그중 하나다. 그 영화 주연을 달리 콜린 퍼스가 한 게 아니다.

● 지금도 “오만과 편견 최고의 각색작”으로 불림. 제인 오스틴 원작을 가장 클래식하고 품격 있게 구현한 전설의 드라마. '콜린 퍼스의 다아시'는 모든 후대 다아시들의 기준이 됨.


미스터 다아시를 찾아, 라임 파크로

디즐리 역 표지판. 아예 하단에 For Lyme Park라고 쓰여 있다.

디즐리 역에 도착해서 구글 지도를 보며 따라갔다.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차만 다니고 걸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글라스고에서는 그렇게 추워서 매일 벌벌 떨었는데 여긴 해가 쨍쨍하고 덥다. 추운 것보다는 나으니 감사하게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생각해 보면 평생 통틀어 스코틀랜드 여행 때만큼 많이 걸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라임 파크 도착. 리플렉션 레이크에 비친 라임 파크의 그림자는 드라마에 나온 그대로다. 당장 저기 어딘가에서 물에 젖은 미스터 다아시가 걸어 나올 것 같다. 베르사유에 가서 오스칼 어딨냐고 물을 때와는 다르다! BBC 오만과 편견을 30번도 넘게 정주행 한 나로서는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이 미스터 다아시다. 아아, 다아시 님...♥

맑은 하늘 아래 연못에 반사된 고전 양식의 대저택, 녹음 짙은 나무들이 주변을 둘러싼 평화로운 풍경

저택 내부는 응접실, 서재, 식당, 침실 등 정말 보존이 잘 되어 있었고, 모든 방과 코너에서 안내해 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었다. 모두 어르신들이었다. 어르신들은 어디서부터 구경해라, 이건 놓치지 말고 꼭 봐라, 이 방은 뭐 하던 방이고 이 소품과 가구는 어디서 가져온 것이다, 라며 적극적으로 관광객들에게 설명했다. 1700년대에 결혼 준비하던 신부가 자수를 놓아 만든 이불인데 결혼 전에 죽었다는 사연이 있는 이불보(관광객들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세상에...! 어쩌다가...! 하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손님을 원치 않으면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손님 사절'을 공지하는 방문, 하녀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과 청소도구를 보관하는 방... 보존도 보존이지만 아직 정정한 노인들에게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면에서 정말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인들은 손주 봐주는 거 아니면 무쓸모로 여겨지는데, 여기서는 노인네들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정말 자부심을 가진 듯이 일하고 있었다. 카페테리아 직원 빼고는 전~부 다 노인이었다. 나중에 다른 성이나 저택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우리나라도 이젠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 다녀온 지 10년이 되어가는 현재도 우리나라 노인들은 여전히 손주 봐주는 인력 이외에는 크게 쓸모를 인정받는 것 같지 않다.


글라스고로 돌아가기 위해 또 370km를 가다

디즐리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료 미니버스(노약자 용)를 얻어타는 바람에 그 먼 거리를 도로 걷지 않아도 되었다. 미니버스 운전사도 할아버지다. 어르신은 "글라스고까지는 못 태워다 준다, 미안!" 하고는 영지(Estate) 입구에 내려주었다.

디즐리 역의 작은 기차... 아니 전철인가?

올 때와는 달리 맨체스터 안 찍고 프레스턴에서 글라스고 센트럴행 기차로 갈아탔다. 근데 프레스턴 도착이 10분 넘게 지연돼서 역에서 겁나 뛰었다. 하지만 갈아타야 하는 글라스고행 기차는 더 늦어서 20분이 넘게 지연도착했다. 아하, 그렇지 여기 영국이지. 열차 지연 따위, 숨 쉬듯 당연한 곳. 뛰어다니는 사람은 코리아에서 온 나 하나뿐이다. 시간이 남아 돌아서 기차역에서 빵도 사 먹었다.


글라스고에 도착한 시간은 밤 아홉 시였다. 깜깜해서 어떻게 집에 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내려 보니 아직 환했다. 아 여기 위도 높지 참... 날씨 어플을 보니 일몰 시간은 무려 21:40. 북쪽은 북쪽이네. 감기 때문에 아파서 초저녁부터 자버렸더니 해가 언제 지는 줄도 몰랐다. 이제부터는 나도 해 떠있는 시간에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과연?).


오늘의 이동 거리. 지도출처: Google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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