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왜 아무것도 없죠?
7월 19일, 여행 6일째.
전날 날씨 앱으로 예보를 보니 글라스고 기준 낮 최고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가는데, 심지어 비 예보도 없었다. 나 도착했을 때 아침저녁 기온이 11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기온이 달라진 게 아니라 '기후'가 달라진 레벨이었다.
아침에 창문으로 비치는 하늘을 보고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무려 색깔이 '파. 란. 색'이었다! 오 마이 갓! 하늘이 파란색! 게다가 아침에 눈 뜨면 추워서 한번 일어났다가 이불 도로 뒤집어쓰곤 했는데 오늘은 안 그러고도 일어날 수 있었다(대체 7월에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밖에 나가니 사람들이 '반팔'에(헐!) '선글라스'를(허허헐!) 쓰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고저쓰하고 뷰티풀한 모닝에 나는 아침부터...
...밀린 빨래를 했다.
세탁기 이용 티켓 £3.20(£=파운드 기호). 건조기는 다행히 공짜. 빨래 양은 생각보다 많았다. 어제 역에서 사서 먹다가 백팩에 넣은 샌드위치가 터져서 향기로운 마요네즈향 백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옷과 백팩까지 싹 다 빨고 깨끗한 여행자가 되었다.
오늘은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 보기로 했다(어디로 갈지는 그날그날 일어나서 결정한다). 로크 로몬드, 로몬드 호숫가로 갈 것이다. 구글맵을 보니 호수 옆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역 이름이 아드루이(Ardlui)이다. 완벽하다. 기차도 좋아하고 호수도 좋아하는 나에게는 오늘 여기가 내 갈 곳이다.
여기에서, 로크(Loch)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가도록 하자.
Loch(/lɒx/, 로크)
호수(lake), 바다/만(bay). 발음은 '/로흐/'에 가깝다. '바흐(Bach)'처럼. 하지만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대부분 '/로크/'라고 한다(바흐는 바크라고 안 하는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Loch Ness(괴물이 산다는 바로 그곳)도 '네스 호'라는 의미의 '로크 네스'다.
이런 스코틀랜드식 지명이 몇 개 더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글렌(Glen), 그리고 벤(Ben)이 있다.
Glen (글렌)
골짜기(valley). 위스키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잘 알 것이다. 글렌피딕(Glenfiddich, 사슴의 골짜기라는 뜻이라서 라벨에 사슴이 그려져 있다), 글렌리벳(Glenlivet, 리벳 골짜기), 글렌모란지(Glenmorangie, 평화의 큰 골짜기), 글렌고인(Glengoyne, 야생 거위 골짜기).
Ben (벤)
산(mountain).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 스코틀랜드 포트윌리엄 근처에 있는 벤 네비스(Ben Nevis, 1,345m)이다. 게일어 Beinn Nibheis, “구름의 산” 혹은 “사나운 산(venomous mountain)”이라는 뜻.
(멀리서 보면 멋지다. 오를 생각은 당연히 없음).
다시, 로크 로몬드로 돌아가서.
호수가 꽤 크다. 남들은 '로크 로몬드 여행' 등으로 검색해서 어디로 가야 호수 감상에 가장 적합할지 알아보고 가는데, 나 같은 사람은 지도를 보고 근처에 기차역이 있으면 그냥 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그곳으로 간다. 그것이 P의 여행이니까(끄덕).
사실, 구글맵을 보고 무작정 가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이전에 스웨덴 룬드(Lund) 가는 여행기에서도 썼는데, 그때도 내가 룬드에 간 방법은 진짜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1. 지도에서 룬드를 찾아본다.
2. 룬드와 가까운 공항을 찾아본다.
3. 비행기표를 산다.
4. 간다.
(5. 공항에 내려서 친구 집에 어떻게 가는지 고민한다)
구글맵에서 러시아를 들여다보며 화아~ 여기는 호수가 디게 크네? 멋지겠지? 나중에 가보면 좋겠다~♥라고 마음속으로 찜해 두었던 장소가 알고 보니 구소련 핵폐기물 저장소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주민들을 전부 다 강제 이주시켜야 했을 정도로 방사능 오염이 심한 곳이다. 갈 수도 없었겠지만 만약 갔더라면...ㄷㄷㄷ) 식겁한 후로는 더 이상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여행하지는 않는데, 당시에는 그냥 호수다! 기차역이 있다! 가자! 하고 그냥 갔다.
글라스고 퀸 스트리트 역으로 기차를 타러 갔다. [웰컴 투 퀸 스트리트] 표지판 밑에 쓰인 저 글자! 낯설지 않은가? 켈빠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나는 전생에 이 지역에 살던 켈트족이나 픽트족이었음에 틀림없다!
바로 스코틀랜드 게일어(Scottish Gaelic)이다.
“Welcome to Queen Street / Fàilte gu Sraid na Banrighinn”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대부분의 공공건물, 고속도로 표지판 등은 영어-게일어 병기가 되어 있다. 내가 에딘버러 살던 2000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2002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정책적으로 A82(고속도로 번호로써 A82는 스코틀랜드 메인 고속도로 중 하나) 도로를 시작으로 영어-게일어 병기 표지를 설치한 이후로 내가 다시 방문한 2016년에는 스코틀랜드 공공건물과 도로 등에는 거의 모두가 병기표시가 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게일어 사용 인구는 1%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웨스턴 아일(Western Isles) 즉 스코틀랜드 서쪽의 섬 지역은 거의 50%에 가까운 인구가, 그리고 하이랜드에서는 약 5%가 게일어를 말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학교에서 게일어 학습은 의무가 아니다. 이것은 웨일스에서 웨일스어(큼라이그, Cymraeg) 교육을 의무화시킨 것과 대조된다. 의무교육화한 덕분에 웨일스에서는 18%가 웨일스어를 말할 수 있는데 반해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1%, 섬 지역의 게일어 사용자들도 고령자들이 대부분임을 고려하면 아마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하와이어, 아이누어(홋카이도), 류큐어(오키나와 지역), 북미 원주민어들과 함께 100년 안에 소멸될 수도 있다. 물론 표지판 병기를 해놓은 이상 아예 죽지는 않겠지만, 언어는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죽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게일어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는 않다.
이렇게 귀한(?)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과연 저 '웰컴 투 퀸 스트리트' 밑에 뭐라고 써놓았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Fàilte gu Sraid na Banrighinn."
Fàilte : “환영합니다” (welcome)
gu : “~로(to)”
Sraid : “거리(street)”
na Banrighinn : “여왕의 (of the Queen)”
발음: 팔추어 구 스라지 나 반리인 [faal-chuh goo srahj na ban-ree-in]
아 뭐라는 거야. 팔추어?
젠장...
모르겠다 일단 가자.
아드루이까지 경치가 어찌나 절경인지, 언덕과 호수들이 이어지며 진짜 눈 호강이었다. 가는 길도 좋으니 아드루이는 정말 끝내주겠지? 하며 내렸는데...
아드루이 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무인 역이었다.
역 이름 밑에도 게일어로 'Àird Laoigh’라고 쓰여 있었다. Ardlui가 Àird Laoigh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발음은 똑같다.
Àird : ‘높은 지대’, ‘언덕’
Laoigh : ‘송아지’
그렇다, 나는 지금 송아지 언덕에 와 있다.
역에서 내린 사람은 나 포함 몇 명 없었다. 역 밖으로 나가니 차 다니는 도로가 하나 있고 조그만 오솔길 하나가 도로 옆을 따라 나 있었다.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내리면 막 우리나라 소양호 청평호처럼 카페라던가 민물 매운탕집(?) 같은 것들이 즐비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아무것도 없지?
걸어가다 보니 호텔 하나와 캠핑카 캠핑장이 나타났다. 구글맵을 보니 이 근처에 있는 '건물'은 이게 다였다. 더 가봐도 도로뿐이어서 더 간들 소용없었다.
뭐, 전망은 좋았다. 어차피 밥도 먹어야 해서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사람이 많은 바쁜 식당이었다. 이렇게 물을 바라보며 밥을 먹고 있으니 춘천 가는 길에 드라이브하다가 막국수를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호숫가니까 뭐라도 있을 줄 알고 고른 곳인데 이 정도로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 배낭을 맨 여행자인 듯 한 사람들 몇 명이 식당에 들어와 "여기는 대체 뭘 할 수 있죠?"하고 물어보고 갔다. 나만 ㅈ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밥을 다 먹고 호숫가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오십 미터 가량 이어지던 길이 끝났다.
ㅅㅂ! 이게 다야?
기차는 두 시간 반 후에나 오는데 나 그럼 뭐 하지? 아까 그 호텔 다시 가야 되나?
요트와 모타뽀-트들이 정박된 마리나 옆에 수상스키 같은 레저샵이 하나 있었다. 젠장 이렇게 된 거 호수에서 모타뽀트라도 타야겠다 싶어서 가서 물어보았다.
“좀 이따가 수상스키 나가는 배 있으니까 그거 타고 호수 구경이라도 하실?“
“와! 좋아요. 얼만데요?”
”어차피 나가는 배라 돈 안 내도 됨ㅇㅇ"
아싸 공짜다. 어찌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가게 청소라도 좀 해 주고 싶었다. 가게 안에서 칭얼거리는 애기를 재우던 부인이 영국 도착 후 처음으로 "어디서 왔냐"라는 질문을 했다(그때까지 사람들하고 말을 거의 한 적이 없어서 아무도 안 물어봄).
빨강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국 총각(배 몰고 나갈 놈)이 나를 보고 '앗, 외국인이다, 어쩌지?'라는 표정으로 말없이 구명조끼를 건네주었다. 수상스키 타러 배에 오른 놈도 붉은 갈색머리의 영국 총각. 그는 몇 번 놓치고 물에 빠지긴 했지만 점프 잘 뛰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수상스키를 탔다. 부러웠다. 난 물속에 들어가면 바로 가라앉는데. 두 사람은 이게 대체 영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지독한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서로 대화를 하며 점프 자세니 높이니 뭐 이런 얘기(그 이상은 못 알아들음)를 하며 몇 번 더 타고, 나는 상냥하고 예의 바른 외국인의 미소로써 그들을 응원했다.
공짜 배를 타고나서, 더 이상 할 것도 없고 기차 올 시간도 돼서 역으로 향했다. 다음 역인 아로카 앤 타벳(Arrochar & Tarbet)에도 내려서 구경하고 가는 게 원래 목표였는데, 시간표를 보니 거기 내리면 글라스고로 돌아가는 다음 열차는 세 시간 후에나 왔다. 대충 아드루이랑 별 다를 것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글라스고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글라스고에서 오반(Oban)과 포트 윌리엄(Fort William)으로 이어지는 이 노선, 즉 웨스트 하이랜드 라인(West Highland Line)은 경치 좋기로 유명한 철도 노선이었다. 그러니까, 기차 타고 오가면서 절경을 감상하는 곳이지 내려서 뭘 하는 곳은 애초에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면 내가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막 가서 아무것도 없는 데로 갔을 수도 있다.
게으른 자는 하루에 한 곳만 여행하는 법이다. 아무리 해가 길어서 밤 10시까지 환해도, 한 곳을 보았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게으른 자의 여행. 하루(1일)는 유럽에서 3개국도 돌 수 있는 시간이련만, 나는 꼴랑 호숫가 시골동네에서 밥 한 끼 먹고 수상스키 배 한번 얻어 탄 다음, 절경에 만족하고 돌아간다. 그것이 백수의 여행이니까(다시 한번 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