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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잉글리시, 오후는 매킨토시

불타기 전의 글라스고 아트스쿨

by 마봉 드 포레

어쩐지, 어제는 날씨가 좋더라니...

창밖을 보니 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다. 이런 날은 나가 봐야 물자루밖에 안 될 거라 일정은 그냥 게으름으로 결정했다. 뭐 언젠 안 그랬냐만은.


2월에 다른 일로 런던 왔을 땐 친절한 사람 만나기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글라스고는 모두모두 상냥하고 친절했다. 어디서 누구에게 뭘 물어봐도,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물어보고 엉뚱한 짓을 하고 이상한 데로 가도, 다들 귀찮아하지 않고 시골 사람들처럼(※영국에서 크기로 두 번째, 인구 규모로 세 번째 도시다) 갈림길까지 데려다주고 설명해 준다. 심지어 홈리스조차도 돈을 주면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를 한다. 물론 런던 거지도 인사는 했던 것 같다만.


비가 조금 잦아드는 것 같길래 아침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펍에 가서 스코티시 브렉퍼스트를 먹었다. 이 동네에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주세요! 하면 "뭐어어? 잉글리시? 잉~글~리~시???!!! 우린 그런 거 없슈!"라고 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 농담이고 대부분 둘 다 판다. 스코티시 브렉퍼스트라고 해서 뭐 특별히 다른 건 아니고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기본템에 스코틀랜드 추가템을 넣은 것이다.


◆ 잉글리시 브렉퍼스트(English Breakfast)

베이컨

소시지

계란(보통 프라이)

베이크드 빈즈

구운 토마토

구운 버섯

토스트

해시 브라운


◆ 스코티시 브렉퍼스트(Scottish Breakfast) 추가템

+ 블랙 푸딩(Black Pudding) : 돼지 피를 넣어 만든 순대 같은 것. 귀리가 들어가서 씹히는 맛이 좋음.

+ 해기스(Haggis) : 스코틀랜드 전통 양 내장 요리

+ 네모 소시지(Lorne Sausage)

+ 감자 스콘(Tattie Scone) : 얇고 감자 들어간 스콘

◇ 요약 :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도 겁나 헤비한데 추가템이 들어갔으니 양이 도랐고 하루 3끼 칼로리를 아침에 이미 다 아작을 냄

◇ 문제점 : 그런 식으로 매일 먹는다

◇ 결과 : 제발... 국밥 좀...

이건 그냥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다

밥 먹고 밖에 나와 좀 걷다 보니 갑자기 해가 쨍쨍 비치기 시작했다. 앗 집에 가려고 했는데, 이러면 돌아다녀야 되잖아! 계획 없이 사는 P는 이런 돌발변수에 당황한다. 날씨 어플을 보니 21도나 된다! 뭐냐 대체! 우산에 방수재킷에 혹시 몰라서 후리스까지 입고 나온 나는 짐이 너무 많아서 모두 버리고 싶어졌다!


해 좀 떴다고 갑자기 거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모두 옷도 가볍도 얼굴도 밝다(기분 탓일지도). 길거리에는 식스팩을 자랑하러 나온 건지 노래를 하러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젊은 놈이 본조비 노래를 부르고, 한 블록 옆에는 스카프를 두른 할머니가 아코디언을 켠다. 다음 블록으로 가니 곱슬머리 안경 낀 아티스트 같은 청년이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예술의 나라다.


매킨토시와 애프터눈 티를 마시다

자, 이제 미술알못, 디자인알못, 건축알못인 김마봉의 매킨토시 티룸 방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일단 글라스고에 온 이상 매킨토시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리버풀에 가서 비틀스, 비엔나 가서 모차르트 흔적 하나도 안 보고 온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매킨토시가 누구인가? 일단 맥북의 그 양반은 아니다. 사실 비틀스나 모차르트처럼 광역으로 유명한 인간은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알아보자.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글라스고의 상징 같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19세기말~20세기 초에 활동했고, 스코틀랜드 전통 + 아르누보 + 기하학적 모더니즘을 섞은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직선과 곡선을 같이 쓰는 절제된 디자인

격자무늬 창문, 얇고 길게 뻗은 선

장식은 최소한으로, 형태의 아름다움 강조

건축뿐 아니라 가구, 조명, 패턴 디자인까지 손댄 ‘종합 예술가’

글라스고에서는 거의 “우리 동네 천재” 취급받는 인물이다.


글라스고 아트 스쿨(GSA, Glasgow School of Art) – 매킨토시 본관

매킨토시의 대표작. 1897~1909년에 지은 건물로, 현대 건축의 전환점 같은 존재라고 평가받는다.

정면의 네모난 격자 창문

묵직한 샌드스톤 벽

건물 전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설계

문과 난간, 철제 게이트까지 매킨토시가 직접 디자인

‘기능적이면서 시적인 건물’이라고 많이 불림

아쉽게도 2014년과 2018년에 두 번 큰 화재가 나서 현재는 복원 중이지만, 그럼에도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중요한 아르누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두 사진은 내가 2016년에 찍은, 즉 2018년 대화재 전의 사진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매킨토시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격자무늬(그리드) 창문

큰 사각형을 다시 작은 정사각형·직사각형으로 쪼개는 창 디자인.
매킨토시 스타일의 핵심 중 핵심이고, 기하학적이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만듦.

2) 직선 + 얇은 금속 프레임

과한 장식을 싫어하던 매킨토시는 가늘고 긴 금속 선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난간, 창문 프레임 등이 모두 매킨토시 스타일이다.

3)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철제 장식

동그라미와 수직선이 조합된 철제 장식과 같은 추상적 모양은 매킨토시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다.

4) 관능적이면서도 절제된 곡선

건물 전체는 직선인데, 장식적 요소(난간 끝, 기호, 덮개 구조)는 부드러운 곡선을 섞음으로써

직선 90% + 곡선 10% 비율의 매킨토시 특유의 아르누보 스타일이다.

5) 석재의 자연스러운 톤 변화 강조

샌드스톤 벽이 균일하지 않고,

색이 살짝 번지는 듯한 자연스러운 질감을 그대로 살려둔 것도 매킨토시의 특징.

장식보다 재료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의도.

6) 불필요한 장식이 없음

고딕처럼 조각 잔뜩 넣고, 빅토리안처럼 화려하게 입히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할 것만 딱 만들고, 그걸 기하학적으로 배치해서 ‘멋’을 만드는 스타일.

2014년의 화재로 건물이 폐쇄 중임을 알리는 안내문

2018년의 대화재

매킨토시의 작품인 글라스고 아트 스쿨의 본관(신관들은 현대식 건물들임)은 2014년에 난 화재로 인해 내가 갔을 때도 폐쇄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외관은 성했기 때문에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사진이라도 찍고 왔는데, 2년 후인 2018년 6월 14일(공사 막바지라 곧 오픈할 수 있었던ㅜㅜ)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글라스고 아트 스쿨은 외관마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화재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과한 장식 아르누보(알퐁스 무하 좋아함) 취향이라 이 건물 보고 뭐시여 이거슨... 감옥 쇠창살이냐? 하면서도 일단 유명하니까 사진 찍고 보자! 했던 건데, 나중에 뉴스에서 전소된 아트스쿨 사진을 보고 전율했다. 그리고 불타버리기 전에 저 건물을 그나마 겉에서라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스크롤 올려서 저 얼마 안 되는 두 장의 사진을 보고 오시기 바란다. 관심이 어찌나 없었는지 꼴랑 저 두 장이 전부다.


글라스고 아트 스쿨(교육 기관으로서의), 그리고 기숙사

글라스고 아트 스쿨은 이름만 들어서는 이게 대학인지 학원인지 알 수 없는데, 학사과정뿐 아니라 석박사 과정까지 갖춘 예술, 건축만 가르치는 독립형 미술대학이다(홍대 미대만 떼서 대학으로 만든 거라고 보면 될 듯).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예술학교로 명성은 세계급이며, 건축, 디자인 계에서는 성지로 취급받는 곳이다.


내가 묵은 유스호스텔은 바로 이 글라스고 아트 스쿨의 학생 기숙사 건물인 마가렛 맥도널드 하우스(Margaret MacDonald House)이다. 바로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인 매킨토시의 부인 이름을 딴 건물이다. 이 기숙사는 방학 때 학생들 다 집에 가고 나면 유스호스텔로 개방하는데, 항상 개방하지는 않는다. 내가 간 해에는 개방하는 해여서 나는 운 좋게도 아트 스쿨 학생들이 묵는 기숙사에서 여러 날 묵었다. 시내 중심가 쪽 유스호스텔보다 시설이 더 안 좋다는 평도 있지만(중심가에서 멀고, 엘베 없고 등등)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도서지역 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또 이곳에 묵었다. 아마 다시 가더라도 거기로 갈 것 같다.


물론...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호텔 같이 더 편안한 곳으로 가고 싶지만, 당시에는 장기간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숙소에 많은 돈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연세가 있으신지라 독방은 써야 하겠기에 이런 식으로 유스호스텔 독방을 골라서 여행했다.

직선을 강조한 검은 의자들이 놓인 차이니즈 티룸. 천장과 벽의 선반들도 딱 매킨토시 스타일의 푸른색 격자 모양이다.

매킨토시가 디자인한 카페, 윌로우 티룸(Willow Tea Room)

오늘 해도 난 김에 찰스 레니 매킨토시 + 마가렛 맥도널드 부부가 함께 설계했다는 글라스고의 명소 윌로우 티룸에 왔다.


나는 애프터눈 티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홍차도 좋아하고 케이크도 좋아하고 스콘도 좋아하고 티팟도 좋아하고 찻잔도 좋아하는데 이 모든 것을 다 갖다 놓은 것이 바로 애프터눈 티다. 아 애프터눈 티 글자 생긴 것만 봐도 너무 좋다. 런던 포트넘 앤 메이슨에서 먹은 55파운드(당시 가격 8만 원 정도) 짜리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가격의 애프터눈 티(돈값해야 한다는 생각에 구역질 날 때까지 먹음)와는 퀄리티가 다르지만, 이곳의 애프터눈 티는 차와 디저트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매킨토시의 디자인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저 의자 생긴 것 좀 보라. 오래 앉아 있으라고 만든 의자가 아니다. 마치 선생님한테 혼날 때나 앉는 것 같은 의자다. 살짝 우리 동네 좀 고급진 중국집(졸업식 때 가는) 같은 느낌도 들긴 한다. 그래서인지 저 홀 이름이 차이니즈 티룸이다.

직선을 강조하고 곡선은 최소화한 화장실과 출입금지 표지판

이 두 표지판(Chinese Tea Room/Toilets Upstairs, No Entry/CCTV In Operation on Stairs)의 폰트조차도 직선은 최대한 강조, 곡선(동그라미)은 점을 찍어버리던가 최소화함으로써 딱 매킨토시다아~! 하고 있다.

왼쪽 이미지: 애프터눈 티. 삼단 트레이에 타르트, 스콘, 샌드위치, 차 / 오른쪽 : 냅킨이 들어있는 쇼핑백 모양의 도자기 꽂이

솔직히 애프터눈 티의 퀄리티는 뭐...

그냥 그랬다. 가격도 저렴한 만큼 나오는 것도 소박했고 맛도 그냥저냥... 집에 가서 라면이나 먹어야겠다(라면이 없다는 게 문제ㅜㅜ)는 생각이 드는 퀄리티? 근데 문제는 우측 사진의 냅킨꽂이다. 쇼핑백 모양의 도자기 꽂이. 세로로 빽빽한 기하학적 라인, 우측의 얼굴 추상화 같이 생긴 것, 그리고 꽃 모양. 두 사람의 합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조합이라고 한다.


너무 예쁘다... 근데 기념품 샵에 안 팔았다. 팔았으면 사왔을 텐데. 도자기라 이동할 때마다 신경써야 했었겠지만.


티룸의 주소가 2개인데, 소키홀 스트리트(Sauchiehall Street)가 본점, 뷰캐넌(Buchanan Street)이 나중에 생긴 곳이다. 내가 간 곳은 두 번째인 뷰캐넌이다(매킨토시 부부가 디자인한 곳은 소키홀 본점). 뷰캐넌 지점의 특징은 민트블루의 격자 구조물이 특징이고 공간이 어쩌고... 모르겠다. 왜냐면 여기 갔을 때는 다시 비가 오더니 흐리고 추워져서 빨리 차나 마시고 들어가 이불 뒤집어쓰고 잠이나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에딘버러에도 지점이 생겼고 프린스 스트리트 한복판에 에딘버러 캐슬이 뙇 한눈에 보이는 죽여주는 뷰 맛집으로 명성이 자자한 듯하다. 게다가 요새 구글맵에 올라오는 사진들 보면 디저트 퀄리티도 엄청 좋아졌으니 혹시라도 가실 일 있으면 나 대신 좀 가 주시기 바란다.


이제 글라스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 포트 윌리엄(Fort William)으로 가야 한다.


가야 하냐고?


여기에서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재커바이트 증기 관광열차(Jacobite Steam Train, 일명 호그와트 익스프레스)를 타야 하니까.


이건 미리 예약 안 하면 못 탄다. 아무리 내가 P중의 P라도 예약 안 하면 못 하는 게 몇 개 있어서 미리 예약해 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거다. 그래서 다른 일정은 다 그날그날 기분 따라 해도, 예약해 놓은 것은 그에 따라 이동해야 한다.


바이바이 글라스고(근데 어차피 또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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