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부리
재커바이트 스팀 트레인은 스코틀랜드 서부 하일랜드에서 운행하는 19세기식 증기기관차 관광 열차다. 포트 윌리엄에서 출발해 말레그(Mallaig)까지 왕복하는 짧은 노선인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 여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차에서 보는 풍경이 아주 장엄하고 미치고 도랐다. 게다가 그 유명한 글렌피넌 고가교(Glenfinnan Viaduct) 위를 지나가는 순간은 해리 포터 영화에서 호그와트 특급이 달리던 바로 그 다리라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운행은 보통 4월~10월에만 하고, 예약 안 하면 절대 못 탄다. 아무리 P의 대마왕인 나도 이것만은 예약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비록 해리 포터 책은 단 한 권도 안 읽은 괘씸한 인간이지만, 조카들 때문에 DVD를 컴플리트 시리즈로 갖고 있는 사람이다. 호그와트 특급이 글렌피넌 고가교를 달리는 장면 따위는 수도 없이 보았다. 게다가 철도를 좋아한다. 그러니 나도 이 기차를 탈 자격이 있다.
게다가 진짜 석탄 태우는 증기기관차라 연기 냄새, 엔진 소리, 칙칙폭폭 리듬까지 전부 '그 시절 그대로'다. 한 마디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를 통째로 기차여행에 압축해 놓은 관광 코스다. 여기까지 와서 이걸 안 타면 바보다.
그리하여 나도 드디어, 여행한 지 9일째인 7월 22일, 그 이름도 유명한 재커바이트 스팀 트레인을 타러 왔다. 하루에 2번 왕복하는 이 귀여운 관광 열차는 한 대로 2번 왕복이 아니라 두 대로 하루에 한 번씩 돌린다. 열차에 탄 관광객들은 어린이들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의외로 노인네들밖에 없었다.
숙소가 바로 기찻길 옆이고 기차역에서도 가까워서, 방에서 고개를 내밀면 미리 역에서 대기 중인 관광열차가 보일 정도였다(동네가 얼마나 작은지 짐작이 가능하다). 런던에서 밤에 출발해서 아침에 포트 윌리엄에 도착하는 칼레도니안 슬리퍼(Caledonian Sleeper - 칼레도니아는 스코틀랜드의 옛 이름이다)에서 내린 사람들도 플랫폼에 서 있는 재커바이트 스팀 트레인 사진을 찍느라 난리였다. 기관실에서는 '진짜 석탄'을 퍼서 나르는 검댕이투성이의 제복을 입은, 얼굴에도 검댕이가 묻은 기관사와 개 한 마리(귀여움)가 타고 있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내 옆자리에는 아일랜드 코크(Cork)에서 온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스코틀랜드 영어와는 또 다른 세계인 아일랜드 영어를 하는 아저씨 두 명과, 단체 관광객을 인솔하는 에딘버러 사는 아줌마 가이드(가이드답게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했다)가 탔다. 아저씨 두 명의 말은 스코틀랜드 영어의 두 배쯤 빨랐고 독일어처럼 들릴 정도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들은 증기기관차 덕후였다(덕후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50일이 넘게 여행하면서 아일랜드를 안 온다는 나에게 그들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진짜로 칙칙폭폭 삐~ 소리가 나는 기차를 타 보다니! 게다가 글렌피넌 역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휘어진 글렌피넌 고가교 위를 지나는데, 기차가 그 위를 지나는 장면을 찍기 위해 이미 일반 열차로 이 역에 도착해서 언덕 위와 다리 밑, 들판 위 등등등등에서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인 사람들이 와아아아아아!! 으와으야아야야아아아아아!!! 하며(진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잘 만든 해리포터 영화 하나로 이 시골 촌동네 역 하나에 이렇게 사람이 북적거리다니, 역시 뭐라도 하나 잘 만들면 몇십 년 우려먹고 살 수 있다.
왕복으로 끊으면 종점인 말레그 역에서 1시간 50분 머무르다가 다시 돌아가는 스케줄인데 동네가 워낙 작아서 1시간 50분 동안에 할 일이 없다. 여기에서 스카이(Skye), 럼(술 럼(Rum) 자를 쓰기 때문에 '칵테일 섬'이라고도 불린다는 가이드 아줌마의 설명이다) 등 이너 헤브리디즈(Inner Hebrides)로 가는 배들이 출발한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동네라 모두 여기서 점심을 먹는데, 이 기차가 들어오는 시간에는 요 동네 식당들이 막 그대로 눈썹이 휘날리게 바빠진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서 엄청 크고 흰 살이 두툼한 피시 앤 칩스를 먹었다. 런던이나 옥스퍼드에서 먹은 피시 앤 칩스는 튀김옷뿐이었는데 여기는 이 동네에서 직접 잡은 크고 싱싱한 대구를 잘 튀겨서 이제까지 먹어본 피시 앤 칩스들 중 가장 맛있었다. 생각보다 두툼해서 먹다 지쳐 포장해 왔다.
밥 먹고 동네 한 바퀴 돌아봤다. 날씨가 다행히 아주 깨끗하게 화창해서 사진도 잘 나왔으니 몇 장 올려 보겠다.
돌아가는 열차에서는 기관차 바로 뒷 차량을 타는 바람에 열린 창문으로 검댕이가 들어와 다들 검댕이투성이가 되었다. 옆자리에 탄 뚱뚱한 아저씨가 손을 창 밖으로 내밀더니 스팀에 손이 닿아서 뜨거운 척했다. 민망할까 봐 깜짝 놀란 척해줬더니 디게 좋아했다. ㅅㅂ... 이런 데까지 와서 나의 대종상감 연기력을 발휘해야 하다니 내 처지도 참 고단하다.
돌아갈 때는 글렌피넌에서 안 멈추고 그냥 간다. 하지만 이 역에서 오후에 출발한 같은 스팀 트레인과 교차하게 되는데, 한 역에 왕복 편 증기기관 열차 두 대가 서 있는 장면도 굉장히 감격스럽다. 두 열차가 교차하는 장면을 찍겠다고 또 온갖 인간들이 카메라 들고 설치고 있다. 세상 어디에나 철덕들이 있구만...
재커바이트 스팀 트레인을 탐으로써 이번 스코틀랜드 여행의 첫 번째 숙제를 해치웠다. 숙소 예약 이외에 미리 예약해 둔 것은 이것과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공연 몇 가지(역시 예약 안 하면 절대 볼 수 없는 것들) 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포트 윌리엄으로 돌아와 게으르고 빈둥빈둥하며 며칠을 더 지낸 후, 경치 아름답기로 소문난 스카이 섬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