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섬, Isle of Skye

by 마봉 드 포레

판타지 섬, Isle of Skye

스카이 섬(Isle of Skye)은 스코틀랜드 북서쪽에 있는 이너 헤브리디즈(Inner Hebrides) 최대의 섬으로, 험준한 산맥과 절벽, 안개 낀 초원, 바다와 호수가 한꺼번에 펼쳐지는 곳이다. 페어리 풀(Fairy Pools - 선녀의 목욕탕 전설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듯?), 올드 맨 오브 스토르(Old Man of Storr) 같은 지형 덕분에 “현실인데 판타지 같은 섬”으로 불린다.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스코틀랜드 여행 기간 중 여기 있을 때가 제일 추웠다), 길은 좁고, 마을은 작지만 그 대신 자연 하나만으로 모든 걸 압도하는 곳이다.


나는 포트 윌리엄을 떠나 지난번에 재커바이트 스팀 트레인으로 갔었던 말레그까지 다시 일반 기차를 타고 갔다. 말레그에서 스카이 섬의 아마데일(Armadale)은 건너편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이라 배를 타고 월미도-영종도 느낌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배로 건너는 시간은 2-30분 정도라 나같이 배 떠 있는 것만 봐도 뱃멀미하는 사람도 별문제 없이 타고 갈 수 있다. 게다가 와이파이도 빵빵 터짐(땡큐!). 숙소 검색 좀 하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여기서는 게일어로 병행 표기를 할 뿐만 아니라 배에서 안내방송까지 게일어로 해준다. 와! 진정한 스코틀랜드에 온 느낌이다.

말레그-아마데일 사이를 운항하는 배(Calmac 회사)의 표지. Lord of Isles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어 있고 게일어로 하단에 이중 표기가 되어 있다.

사실 스카이 섬은 인버네스에서부터 도로와 다리로 연결된 섬이다. 하지만 포트 윌리엄에서 출발하는 나는 왠지 말레그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고 싶었다 - 라기보다는 그냥 지도를 보고 그쪽이 직선거리 기준으로 제일 가까워 보여서 그냥 그렇게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도 다니고 있었는데 난 버스가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얘기 안 했던가? 나 그냥 무작정 다닌다고...


스코틀랜드 여행 12일 차

7월 25일, 벌써 여행한 지 12일째였다. 이제 조금 스코틀랜드 생활(?)에 익숙해졌다. 2000년 에딘버러 월세방 살던 학생 겸 외노자 시절에 비하면 엄청 빠른 적응이다. 무려 1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래도 그때 살았던 익숙함이 아직은 몸에 조금 배어 있었다. 어떤 거냐면:


1. 잔돈 처리 능숙. 잔돈을 거의 남기지 않고 짤짤이를 능숙하게 다 사용한다. 특히 영국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오각형 모양의 20p짜리 동전이 있다. 다른 나라 가면 잔돈 처리가 서툴러서 한국 돌아올 때쯤이면 짤짤이만 한 움큼인데, 영국은 돌아올 때 1펜스(가장 작은 단위. 오늘자 환율 기준 19원쯤 된다) 짜리까지 탈탈 털고 온다.


2. 5-6시면 가게들이 다 문 닫는걸 몸이 미리 알고 알아서 숙소로 들어간다.


3. 비싼 물가에 놀라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가끔은 뭔가를 보고 오 싸다! 하면서 놀라기도 한다. 근데 이건 한국 물가가 그동안 많이 오른 탓도 있다.


4. 화장하지 않는다. 처음 도착해서 며칠 동안은 가볍게 화장을 했는데 며칠 지나고 나니 아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하루에도 부슬비가 열두 번은 오는데 그 비 얼굴에 5분만 맞으면 화장 모두 안녕이다(단, 항상 피부가 촉촉함 - 자연보습). 그래도 에딘버러 도착하면 곱게 꾸미고 클래식 공연도 가야 하니 화장품은 일단 갖고 다녔다.


정겨운 포트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흰색과 노랑 핑크 등 색색깔의 집들이 보이고, 바다 위에는 배가 떠 있는 포트리 항구의 정경

스카이 섬에서 가장 큰 도시... 가 아니라 마을인 포트리(Portree)에 도착하니 포트리 광장에 각국 먹거리 장터가 열려 있었다. 스페인 아저씨가 빠에야를 팔고, 프랑스 부부가 크레이프를 굽고, 독일 아저씨가 소시지를 팔고 있었다. 심지어 소시지 파는 가게는 파운드 말고 유로도 받는다고 쓰여있었다. 여기서 김밥 장사 하면 팔릴까 안 팔릴까 생각하며 이것저것 사 먹었다.


포트리의 시그니처 풍경은 포트리 항구 주변의 파스텔컬러의 집들과 항구의 풍경이다. 엽서에도 항상 등장하는 이 파스텔 집들. 하지만 날씨가 365일 중에 350일 정도는 흐리고 비가 오기 때문에 이쁜 사진을 얻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핑크. 하늘색. 민트. 노랑의 집들과 포트리 항구.

포트리 앞바다와 갈매기 - 어느 나라나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되는 모양이다.

Do not feed the seagulls 표지 바로 옆의 갈매기 한 마리. 포트리 항구 앞바다에 떠 있는 배들.


포트리 광장의 백파이프 공연

포트리 백파이프 밴드 거리 행진. 배경에 있는 식당인지 술집인지 이름이 쿠쿨린(Cuchulin)이라는 것도 눈여겨보자.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민화에 나오는 거인 이름이다.

나는 포트리 광장에서 이 퍼포먼스를 보고 당장 이 부족(Clan)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뭐부터 하면 되죠?


일단 내가 직접 찍은 동영상 링크 올린다.

부족장님(아님) 간지 좔좔. 맨 앞줄 가운데 있는 키 큰 총각 잘생김(여자들이 다 그 총각만 쳐다봤다).

스코틀랜드 어딜 가든 백파이프 소리는 귀 따갑게 들을 수 있지만, 이렇게 밴드가 행진하는 걸 보고 있으면 당장 개명부터 하고 부족의 일원이 되고 싶어진다.

동영상 출처 : 나


포트리의 숙소

드디어 진짜로 비앤비(B&B, Bed and Breakfast)에 묵게 되었다. 말 그대로 재워 주고 아침밥을 주는 영국식 숙박업소다. 마리(Màiri)라는 이름의 할머니와 딸인 이조벨 아줌마가 운영하는 비앤비였다. 큰 3층짜리 집의 꼭대기 소공녀 세라 방처럼 작지만 진짜 영국 집 느낌의 방이고 욕실은 공동 사용이지만 깨끗하고 더운물 잘 나오고 아침밥까지 푸짐하게 주면서 이 비싼 성수기에 겨우 33파운드밖에 안 받았다. 다른 데는 공동욕실에 방도 구리면서 70파운드까지 받는데도 방이 없어서 난린데 이 집은 정말 양심적이라 묵으면서도 미안할 정도였다.

이 집은 내가 스카이 섬에서 묵을 곳이 없어 찾고 찾아 이메일 주소로 물어 물어가며 겨우 예약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계속 묵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며칠 지내다가 1박씩 메뚜기처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처지였다. 스카이 섬은 최근 몇 년 간 방문객이 두세 배 늘어나는 바람에 성수기에 방 구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졌다는 설명이었다.


그건 나도 잘 알지ㅜㅜ 진짜 하루에 버스 두 번 다니는 구석진 시골 동네 게스트하우스까지 메일 다 돌려 봤지만 방이 없었거든... 어찌저찌 하나씩 방 나오는 대로 잡아서 겨우 스카이 섬 체류기간 동안의 숙소는 다 예약할 수 있었다.

숙소는 광장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넓은 공터 옆에 있었다. 앞 뒤 옆으로 훤하게 뚫려 있어서 집 앞에 서있기만 해도 좋았다. 내내 흐리고 비 오고 바람 불다 진짜 딱 한번! 파란 하늘이 보여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무지개를 이렇게 반원형에 가깝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ㅜ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포트 윌리엄에서 한 달, 포트리에서 한 달 살아보고 싶다. 특히 포트 윌리엄과는 달리 포트리는 숙소 문제로 오래 있지 못해서 더욱더 아쉬웠다. 정말 춥고 바닷가라 바닷바람이 휘몰아치는데도 동네가 왠지 따뜻한 곳이 바로 포트리였다. 딱히 뭔가 한 것도 없는데도.


나는 스카이 섬에서 당일치기 명소 투어에 참가하고, 유명한 탈리스커 양조장에도 가보고, 맥클리오드 가문의 성인 던베건 성에도 가보고, 동네 극단 청년들의 민담 뮤지컬 공연에도 가보고, 서점에 가서 민화책도 사고, 동네 식당이나 카페에서 멍 때리기도 하고, 버스 타고 지나가다가 경치가 멋있어 보이면 내려서 하이킹도 했다.


그곳은 정말... 그냥 앉아만 있어도 글이 쓰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었다.

근데 왜 안 썼을까...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땐 글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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