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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윌리엄의 게으른 소녀

(늙은) 소녀의 게으른 포트 윌리엄 생활

by 마봉 드 포레

외딴섬 검은집 소녀

메이벨 에스터 앨런(Mabel Esther Allan)의 소설 『외딴섬 검은집 소녀(An island in a green sea, 1972)』는 1920년대 외(外) 헤브리디즈 제도의 작은 섬(심지어 개인 소유)에 사는 가난한 소녀 마리(Màiri)의 이야기로서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에이브(Abe, 에이브러햄 링컨의 그 에이브 - 아베 아님) 시리즈에 들어 있는 책이었다(이 시리즈나 이 소설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로 치면 흑산도 주변 깡촌 섬 시골마을 정도 되는, 그나마 큰 섬까지 가려면 정기적으로 가는 배조차 없어 마을의 배 가진 사람에게 돈을 주고 건네달라고 해야 하는 촌동네에 책을 쓰는 "런던 여자" 이자벨이 자료 수집차 찾아온다.


마침 두 오빠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집에 빈 침대(빈 방이 아니라 빈 침대다. 스코틀랜드 서해안과 헤브리디즈 제도의 전통 가옥은 방 구분이 없다. 추우니까 열을 골고루 분산하려면 한 통이어야 하고 사람과 가축이 같은 공간을 쓰기도 했다)가 있는 마리네 집에서 이자벨 양이 일 년 동안 하숙하는 동안 마리는 이자벨 양을 통해 신문물(?)에 눈을 뜨고, 이자벨 양을 따라 바다 건너 포트 윌리엄을 거쳐 글라스고(초 대도시)에도 가보는, 시골 소녀의 성장 스토리이다.


스토리 자체는 잔잔한 편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모두 실제 지명들이며 스코틀랜드 외해 섬의 자연 묘사가 뛰어나다. 세찬 바람, 나무 한 그루 없는(바람이 너무 세서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거칠고 척박한 섬, 토탄(피트)을 캐서 불을 때는 사람들, 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납작하게 지어진 검은 집(Blackhouse: 벽은 두꺼운 돌담으로 두르고, 해초와 짚을 두르고 돌로 누른 집. 왜 검은 집이냐면 이 형태의 집은 굴뚝이 없어 천장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조라 연기에 그을려 그을음으로 집이 검다고 해서 검은 집이다. 지금은 민속촌처럼 관광지로만 남아 있다), 먹고살기 힘들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마을 사람들과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생활...


그 마리가 해협을 건너 에그(Eigg), 콜(Coll), 바라(Barra) 섬을 지나 본토의 말레그(Mallaig)에 도착, "기차(!!!)"를 타고 이자벨 양의 삼촌의 별장이 있는 네비스 골짜기(글렌 네비스)로 가기 위해 도착하는 곳이 바로 여기 포트 윌리엄이다.


글라스고 퀸 스트리트에서 6량으로 출발한 기차는 크라이언라릭(Crianrarich - 마리가 글라스고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언니 제인과 잠깐 만나 점심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소설에는 꽃이 피어있는 조용한 역으로 묘사되지만 지금은 산업자재가 쌓여있는 망해가는 동네 같은 역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배경은 1920년대다. 즉 거의 백 년 전을 무대로 하고 있으니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다)에서 두 개로 갈라져 하나는 오반(Oban), 하나는 포트 윌리엄을 거쳐 말레그(Mallaig)로 간다. 둘로 갈라져서 3량으로 운행하는 기차... 귀엽고 설렌다.


포트 윌리엄(Fort William) - 내 숙소 어디에?

포트 윌리엄은 그런 이유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도착해 보니 너무 조그만 동네라 깜짝 놀랐다. 게다가 숙소는 개장한 지 겨우 9일밖에 안 된 새집 냄새 물씬 나는 곳이었다. 웨스트 하이랜드 대학의 기숙사로 쓰기 위해 지어 놓은 곳으로 학기 시작되어 학생들이 개시하기 전에 임시로 호텔로 쓰이고 있었다.


일단 너무 비쌌다. 글라스고 유스호스텔 가격의 두 배였다. 그러나 여기는 작은 동네라 이렇다 할 호텔도 몇 개 없고, 다 소규모 B&B들이다 보니 방이 없었다. 비싸다고 불평할 것도 없는 것이 여기조차 거의 만실이었다.


하지만 새거라 시설은 아주 좋았다. 글라스고 숙소는 내가 좋았다고 표현은 했지만 너무 낡고 샤워도 공동욕실에 그나마 부실하기까지 해서 씻을 때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워서 좀 힘들었는데, 여기는 개인 샤워실에 물도 아주 그냥 뜨끈뜨끈 콸콸콸!!! 공동 부엌도 쌔삥이고 전자레인지도 있다! 하지만 일박에 거의 15만 원ㅜㅜ 젠장 샤워 하루에 두 번 할 테다. 전자레인지도 괜히 돌려볼 테다.


그렇게 좋은 이곳을 찾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왜냐면, 지어진 지 너무 최근이라 지도에 나오지를 않았다. 호텔스닷컴 앱에는 길 이름만 나오고 번지수도 없고 이 건물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쓰여있지도 않았다. 영국 호텔스닷컴 콜센터에 전화해 봐도 알아보고 연락 준다며 아무도 콜백 안 해줬다. 나중에 '여기로 전화해 봐라'하고 알려준 전화는 어떤 아줌마가 받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잘못 걸었다며 딸깍 끊어버렸다.


어쩔 줄 모르고 길거리에 서 있는데 지나가던 할머니가 택시 기다리냐고 물어보았다(어느 나라나 노인들은 오지랖도 넓고 친절한 편이다). 내가 건물 이름을 대면서 혹시 이런 데 아냐고 물어보니 할머니가 말했다.


"네가 서있는 바로 그 건물이 거긴딩?"


"헐! 간판은요?"


"이제 막 지어서 그런 거 읍써!"


할머니는 입구가 여기였던가... 저기였던가... 하면서 주변을 나와 같이 돌며 입구를 찾아주었다. 정말 스코틀랜드 노인들 친절하다. 여행하는 내내 불쌍하고 바보같이 멍따고 있는 동양 여행자인 나에게 말 걸어 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스코틀랜드 노인들이었다.

새삥 건물, 웨스트 하이랜드 대학 기숙사

돈 내고 노숙할 뻔했는데 숙소 찾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벨파스트에서 여름 동안에만 알바 뛰러 왔다는 착하게 생긴 청년이 방과 부엌을 안내해 주었다. 일층에 앉아 겨우 와이파이를 잡고 있으니까 다른 여행자가 "난 부킹닷컴에서 예약했는데 거기도 길 이름만 있고 번지수는 안 적혀 있었어. 그치만 거긴 그래도 건물 사진이 있어서 그거 보고 찾아왔어."라고 말했다.


호텔스닷컴은 방 내부 사진밖에 없었는데ㅜㅜ 젠장 나쁜 놈들. 악플 남겨 주겠다. 동네가 쥐똥만큼 작으니까 그나마 길 끝에서 끝까지 왕복 서너 번을 하면서 찾아 헤매도 건물 외관 사진 보고 찾아올 수 있는 거지 아니었어봐. 길이 길었어봐... 할머니 안 지나갔어봐...


포트 윌리엄 시내 - 아이구 번화하닷!!!

왼쪽 가게 간판 좀 봐 아악 저 폰트... 켈틱 폰트...

자, 여기가 포트 윌리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나 같은 소심하고 간 작은 사람에게는 이 정도 사이즈의 읍내가 딱이다. 너무 아기자기하고 정겹다. '외딴섬 검은집 소녀'의 마리도 스코틀랜드 사탕인 타블렛(Tablet - 태블릿 PC 아님)을 사 먹으며 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너무나 번화해서 깜짝 놀라며(나의 경우는 너무 소박해서 깜짝 놀라며).

문경새재 느낌 나는 포트 윌리엄 정경(리들 마트 주차장 뷰)

지방 소도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금도, 물론 에딘버러를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포트 윌리엄도 한 번에 일주일씩 2번 총합 두 주일이나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산촌(?)을 좋아하는지, 포트 윌리엄은 묘하게 그리운 포근함이 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면 아마도 포트 윌리엄은 산으로 둘러싸여 어딘지 아늑해 보이는 맛이 있어서인 것 같다.


위의 사진은 숙소 바로 근처의 마트 체인 리들(Lidl)인데 이게 포트 윌리엄의 풍경이다. 한쪽에는 해협이, 한쪽에는 거대한 산들이.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1,345m)인 벤 네비스도 바로 이곳에 있다. 포트 윌리엄 시내에서는 고개만 들면 벤 네비스가 보인다. 그냥 고개 들었는데 산이 좀 큰 게 보인다 싶으면 그게 벤 네비스다(위의 사진에서 중앙에 멀리 능선이 보이는 산이 벤 네비스).

나는 포트 윌리엄에서 글라스고에서보다 더욱더 빈둥거렸다. 재커바이트 증기 관광열차를 타러 간 것 말고는 대부분 읍내를 돌아다니고, 마트 가서 장을 보고, 워터프런트에서 물멍을 때리고, 주변 마을까지 슬슬 걸어가거나 펍에서 TV를 보면서 로스트 치킨(존트 맛없었다)에 맥주를 마시거나 어떤 날은 추워서 그냥 숙소에서 누워서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포트 윌리엄을 떠올리면 굉장히 추운 동네였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잠깐 그곳의 주민이 된 것 같다. 혹시라도 기회가 다시 온다면 포트 윌리엄에서(물론 여름에 - 추운 건 싫다) 한 달 정도 지내보고 싶다.


018.png 글라스고 - 포트 윌리엄. 생각보다 멀다. 지도출처: Google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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