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방향으로 돌까, 반시계 방향으로 돌까
자고로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면 무작정 떠나야 한다고 했나니.
이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해외출장을 진짜 많이 갔다. 해외여행도 많이 갔다. 대략 항공사 직원으로서 뽕은 뽑았다. 하지만 직원이 휴가를 오래 가면 위험한 일을 당할까 봐 걱정이 많으신 사장님들이 많이 사는 정(情)의 나라 대한민국 직장 사회의 특징에 따라 재직 중에 장기간 여행은 가본 적이 없었다.
계획 따위 없이 일단 떠나고 보는 대왕급 P인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획을 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스코틀랜드가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였다면 아마 계획 없이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6년 전에 에딘버러에서 반년을 살아 본 나는 알고 있었다. 일 년 중 이 동네 여행하기 좋은 기간은 매우 짧다는 것을.
내가 에딘버러에 살기 시작한 것은 8월 말이었다. 유명한 '에딘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막을 내릴 때쯤이었다. 이미 긴팔을 입어야 하는 날씨였고 그 후 9월 초부터 겨울까지 그냥 비, 흐림, 비, 흐림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그때 페스티벌을 구경 못 한 것이 한이라, 이번에는 페스티벌도 원 없이 구경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졌다. 언제 시작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는 모르나, 끝은 '8월의 에딘버러'여야 한다는 것.
나의 P 성향은 유전이 크다. 나보다 훨씬 더 큰 P인 엄마랑 같이 처음으로(아무 계획이고 예약이고 없이) 제주도를 여행했을 때, 제주공항에 내려서 엄마가 말씀하셨다.
"시계 방향으로 돌까, 반시계 방향으로 돌까?"
이 경우 나의 여행의 끝은 8월의 에딘버러로 정해졌으므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했다. 즉 글라스고 in, 에딘버러 out이다. 좋아, 이 정도면 내 기준 계획 다 짠 거다. 이제 가기만 하면 된다!
...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이유는 이랬다.
● 페스티벌 기간의 에딘버러는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어 숙소 구하기가 힘들다.
● 스카이 섬(Isle of Skye) 같은 인기 관광지도 여름 성수기에 숙소 구하기가 힘들다.
● 스코틀랜드 도서 지역이나 하이랜드의 시골 동네는 숙소 자체가 몇 개 없다. 미리 예약 안 하면 길에서 자야 한다(=입이 돌아갈 새도 없이 저체온으로 죽는다).
● 이제 나도 나이가 있어 유스호스텔이나 백패커즈 같은 공동 숙소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대강의 루트를 짠 다음(세상에 내가 여행하면서 루트를 짜다니...!) 중간중간에 버퍼 일정을 둔 상태로, 미리 예약 안 하면 큰일 나는 곳의 숙소를 예약하기 시작했다. 호텔스닷컴, 아고다, 부킹닷컴, 호스텔월드(호스텔에도 개인실이 있는 곳들이 있다)... 세상 참 좋아졌네. 라떼는 말이야 온라인 예약이 다 뭐야, 전화 예약 아니면 지나가다가 'VACANCY(방 있음)' 표시 있으면 들어가서 묵고 그랬어(꼰대 맞음).
나는 한국에 편안히 앉아서 이렇게 지구 구석탱이의 숙소 예약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는 크나큰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바로 위에서 말한 '스카이 섬'의 숙소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안 하겠지만 당시에 스코틀랜드 시골동네는 온라인 예약 사이트로 예약할 수 있는 숙소가 별로 없었다. 스카이 섬 같은 인기 관광지조차 그랬다. 온라인 예약 가능한 호텔들이 있었지만 피크 시즌이라 가격도 비싸고 그나마도 방이 없었다.
B&B들은 말 그대로 민박이라, 온라인 예약 사이트에 수수료를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당시 영국의 B&B들은 정말 조잡하기 짝이 없는 예약 사이트(인터넷이 느린 영국 답게 이미지 하나 없이 텍스트 위주의 html로 만들어져 있었다)나 이메일로 예약을 받고 있었다. 나는 숙소를 찾다 찾다 결국 구글맵을 뒤져 스카이 섬의 B&B들 전화번호를 찾아 방 있냐고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다 없다고 했다. 일 년 전부터 예약이 다 찬다는 것이었다.
한 친절한 주인이 자기넨 방 없지만 대신 다른 B&B들에게 물어볼 수 있게 B&B 주인장들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 양반이 알려준 메일주소로 메일을 몇 개 날려 보니 연박은 어려워도 하루이틀씩 방이 있는 곳들이 있었다. 나는 그래서 스카이 섬에서는 포트리에서만 빼고 메뚜기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하루씩 옮겨 다녔다.
이제는 짐을 싸야 했다. 짐이라 함은 원래 여행 가기 전날 싸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한 숙소에서 편히 지낼 수 있는 동남아 여행과는 달리, 이번 여행은 계속해서 이동하는 루트였다. 게다가 기간도 길었다. 에딘버러에 거점을 두고 1박 2일, 2박 3일로 근교 여행 다닐 때야 배낭 하나만 메고 가도 됐었지. 이번에는 여행 내내 필요한 걸 다 들고 다녀야 하는데, 계속 이동은 해야 하니 내가 아무리 맥시멀리스트 세계 챔피언 급이어도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는 여름에도 추운 날은 오지게 추웠다. 에딘버러 살 때 거기 사람들이 "잉글랜드에서는 한 달 동안 네 계절을 다 느낄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하루에 네 계절을 다 느낄 수 있다"라고들 했는데, 진짜로 그랬다. 반팔 입은 사람과 코트 입은 사람을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곳이 거기였다. 물론 비 오는 추운 날 미친놈처럼 반팔에 쇼츠만 입고 러닝 하는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도 따뜻한 옷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의 물건들(내 딴에는 - 그래도 여행하면서 본 그 어떤 사람들보다 짐이 많았다) 위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여행 준비 중.
1. 짐은 벌써 다섯 번 정도 다시 싸고 있다.
2. 등산화와 등산바지를 준비했다.
3. 등산배낭도 준비했다.
4. 등산재킷도 준비했다.
5. 누가 보면 등산하러 스코틀랜드에 가는 줄 알겠다.
평지가 아니면 걷지 않는 나도 이번에는 등산화, 등산바지 등을 준비해야만 했다. 물론 등산을 할 생각은 없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춥다고 모직코트 이런 거 못 입는다. 패딩도 마찬가지다. 에딘버러 살 때 한국에서 가져간 두터운 패딩코트를 입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서 짜면 물이 한 바가지가 나왔다. 즉 방수가 되지 않으면 입을 수 없다. 맨날 비 오고 바람 부니까. 가장 좋은 조합은 방수가 되는 널럴한 재킷 속에 플리스를 껴입는 것이다.
동남아 여행 가서 예쁜 원피스 입고 살짝 뒤돌아보며 인스타용 예쁜 사진 찍는 거, 물론 나는 그딴 사진 찍지도 않고 찍어주지도 않지만(같이 여행 가서 자꾸 지 사진 찍어달라던 친구와는 손절했다), 추위와 비바람 앞에서는 한낱 감기 걸리기 전의 마지막 Gae지랄일 뿐이다. 뭐? 화장? 화아아장? 비 맞아 다 지워질 걸 뭐 하러 화장을 해! 보습은 얼굴에 비 맞으면 그게 보습이지!
짐을 거의 다 싸 갈 무렵, 나는 단골로 다니던 미용실에 가서 원장님한테 말했다.
"머리 잘라 주세요."
"열심히 기르셨는데 아깝게... 어떻게 자르실 건데요?"
"여행 가야 해서요. 손질 안 해도 되게 거지커트로 잘라 주세요(진짜로 이렇게 말했다)."
원장님은 한참 동안 주저하더니, 내 여행 계획을 대충 듣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어요. 바람에만 말려도 되는 머리로 잘라 드릴게요."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직장 동료가 런던행 비행기의 예약 상황을 알려 주었다. 7월 14일, 나는 거지커트 머리에 장시간 비행에 걸맞은 편한 옷을 입고,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인 21kg짜리 캐리어를 들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