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각본을 건넨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성별, 나이 직업이라는 이름의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에 맞는 대사와 행동을 학습한다.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대 위에서 그 각본은 더욱 엄격해진다. 누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관계가 ‘정상’이고 어떤 관계가 ‘일탈’인지, 보이지 않는 연출가가 끊임없이 속삭인다. 우리는 그 속삭임에 따라 웃고 울지만, 정작 그 각본을 누가 썼는지, 왜 따라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이것은 그 오래된 각본의 한 페이지, 나이 차이라는 금기에 대해 두 남녀가 나눈 짧은 대화 기록이다.
1. 아침 안개의 도시
목요일 아침, 보보가 운전하는 차는 대구의 희뿌연 안갯속을 더듬더듬 나아가고 있었다. 10월 말의 공기는 차가웠고,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만이 김경훈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조수석에 등을 깊게 기댄 채, 창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젖은 노면 위를 미끄러지며 내는 마찰음,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 그리고 간헐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빗방울 소리. 그의 발치에는 안내견 탱고가 세상의 모든 소란과 무관하다는 듯 웅크리고 있었다.
“보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침 공기처럼 조금 잠겨 있었다.
“응?” 그녀는 운전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녀의 옆얼굴 실루엣은 집중할 때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까지, 그의 기억 속 이미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어젯밤에 TV 보다가 문득 이상한 걸 깨달았어. ‘무엇이든 물어보살’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보보가 피식 웃었다. “우리 김 박사님, 이제 보살님들 영역까지 섭렵하시는 건가? 그래서 뭘 깨달으셨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연상의 연인이 연하의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다정하고 짓궂은 애정이 묻어 있었다.
2. 각본의 온도 차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밝았지만, 눈썹 사이에는 미세한 질문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연애 있잖아. 왜, 여자가 나이가 많고 남자가 어린 커플은… 뭐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좀 너그럽게 그려지는 것 같지 않아? 심지어 약간 로맨틱하게 포장되기도 하고.”
“음… ‘동갑내기 과외하기’ 같은 거 말하는 거야?” 그녀가 신호 대기에 차를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장난스러웠지만, 동시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지적인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응, 그런 거. 권상우랑 김하늘 나왔던 거. 좀 오래되긴 했지만. ‘상두야 학교가자’의 공효진이랑 비도 그렇고. 심지어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이정진이랑 선도부 떡볶이집 하던 그 아주머니 관계도, 뭔가 애틋한 구석이 있었지.” 그는 15년 간의 시각적 기억 속 영화 아카이브를 빠르게 검색하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반대로 남자가 훨씬 나이가 많고, 특히 상대가 어린 여자, 예를 들어 남자 선생과 여학생의 관계는… 그건 로맨스가 아니라 그냥… 범죄처럼 느껴지잖아. 아무리 미화하려고 해도 어딘가 불편하고.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3. 힘의 비대칭성, 혹은 익숙한 클리셰
보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와이퍼가 유리창의 빗물을 닦아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철학 박사다운 냉철함과, 연상의 연인으로서의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예민한 게 아니라, 당신은 그냥 사회가 써놓은 각본의 온도 차이를 정확히 감지한 거야, 자기. 당연히 불편하지. 거기엔 명백한 힘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니까.”
“힘의 비대칭성…?”
“그래.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 거기엔 단순히 나이 차이만 있는 게 아니잖아. 사회적 지위, 경제력, 경험… 모든 면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지. 그 관계가 아무리 순수하게 시작되었다고 해도, 권력관계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기는 어려워. 사회는 본능적으로 그 불균형이 가져올 수 있는 착취의 가능성을 경계하는 거고.”
그녀는 핸들을 돌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차 안이 잠시 어두워졌다.
“반면에 여자가 나이가 많은 경우는… 뭐랄까, 그 힘의 역학이 좀 더 복잡하게 작동하지.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니까, 연상녀-연하남 커플에서는 그 권력관계가 어느 정도 상쇄된다고 느끼는 걸지도 몰라. 혹은 그냥 익숙한 클리셰에 더 관대한 걸 수도 있고. 모성애, 연하남 길들이기… 뭐 그런 낡은 서사들 말이야.”
4. 우리가 보고 싶은 이야기
김경훈은 보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권력.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 그는 시각을 잃은 후, 세상의 소리와 감촉, 그리고 언어 속에 숨겨진 미묘한 힘의 균형에 더 예민해졌다. 그는 어쩌면 눈으로 보는 사람들보다, 이 사회적 각본의 불공정함을 더 명확하게 ‘감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떠올린 영화들은 단순한 예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적 통념과 편견을 재생산하는 강력한 문화적 데이터였다.
그는 문득, 자신과 보보의 관계를 생각했다. 나이 차이. 그 역시 이 ‘비대칭 로맨스’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관계 속에서 어떤 권력의 불균형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의 지성과 감성을 존중하는 수평적인 파트너십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회적 각본을 벗어난 예외일까, 아니면 그저 각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배우의 착각일 뿐일까. 한때 마음을 치유하는 ‘심의(心醫)’를 꿈꿨던 그는 이 사회적 각본이 개인의 마음에 남기는 상처와 혼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가 연구실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지고 있었다.
“결국,” 김경훈이 차 문을 열기 전,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해답을 찾지 못한 자의 희미한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 “우리가 보는 건 로맨스 그 자체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보고 싶어 하거나, 혹은 보도록 길들여진 이야기의 틀인지도 몰라.”
보보는 그의 말에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잠시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내려서 전화해, 여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했다.
김경훈은 탱고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빗방울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는 보이지 않는 도시의 거리 위에서 보이지 않는 각본의 무게를 느끼며,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