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쩌면 그래?
사람이라 그래!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 존재라 믿는다. 이성과 논리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고, 예측 가능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행성처럼 살아가려 애쓴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언제나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이 변덕스러운 신(神)이 혹은 그저 고장 난 기계처럼 예측 불가능하게 오작동하는 무언가가 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면서 증오하고, 갈망하면서 파괴하며, 스스로 세운 원칙을 보란 듯이 배반한다. ‘사람이 어쩌면 그럴 수 있는가?’ 이 당혹스러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이것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잔인한 대답에 관한 기록이다.
1. 금요일 오후의 엔트로피
김경훈은 익숙한 혼돈 속을 걷고 있었다. 퇴근 시간의 대구 교정은 일주일간 쌓인 지적 피로와 주말을 향한 들뜬 기대로 뒤섞여,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처럼 무질서하게 팽창하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서 안내견 탱고는 이 예측 불가능한 인간들의 동선을 능숙하게 헤쳐나가며 그를 안전하게 이끌었다. 그의 귀에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마른 은행잎이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소리가 뒤섞여 들어왔다. 그의 코는 차가워진 공기 속 희미한 커피 향과 누군가의 담배 연기, 그리고 다가오는 저녁 식사의 냄새를 감지했다.
그는 오늘 오후, ‘인간은 왜 스스로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행동경제학 세미나에 참석했다. 인지 편향, 휴리스틱, 시스템 1과 시스템 2. 수많은 개념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정작 인간의 비합리성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유쾌함을 잃지 않았지만, 미간에는 풀리지 않는 질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선배님!”
익숙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박민준이었다. 그는 중앙도서관 앞 벤치에, 마치 내팽개쳐진 외투처럼 구겨져 앉아 있었다. 한때 ‘혁신’이라는 꼬리를 좇던 젊은 CEO의 빛나던 눈빛은 사라지고, 깊은 자기혐오와 피로감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의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힘없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2. 변명의 구조
김경훈은 탱고를 멈추고 그의 옆에 섰다. “민준 씨,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ENFJ 특유의 따뜻한 관심이 묻어 있었다.
민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값비싼 운동화 끝만 바라보며, 손톱 옆의 살을 초조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김경훈은 그의 불규칙한 호흡 소리와, 옷깃에서 풍겨오는 희미한 술 냄새를 감지했다.
“제가… 제가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민준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종이처럼 힘없이 찢어졌다. “어제 투자자 미팅이 있었는데… 잘 안 됐어요. 그런데 그 책임을… 전부 팀원 탓으로 돌려버렸습니다. 사실 제 판단 착오가 가장 컸는데도요. 그 친구들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는 고개를 들어 김경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비겁하게… 사람이… 사람이 어쩌면 그래요?”
그의 질문은 김경훈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김경훈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했다. 그는 민준의 행동을 행동경제학의 ‘이기적 편향’이나, 정신분석학의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그 어떤 이론도 지금 민준이 느끼는 깊은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온전히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민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글쎄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판단이나 비난의 기색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때로는 자신이 경멸하는 모습으로 행동하곤 하죠. 그 이유를 찾는다고 해서 그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때로는 명쾌한 해답보다, 혼란스러운 질문을 함께 견뎌주는 침묵이 더 깊은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그는 병원에서의 3년을 통해 배웠었다.
3. 가장 오래된 대답
그날 밤, 그는 보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 편안히 기대앉아, 창밖으로 스며드는 도시의 희미한 소음과, 전화기 너머 보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탱고는 그의 발치에서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그는 보보에게 오늘 만난 민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혼란, 그의 자기혐오, 그리고 그가 던졌던 마지막 질문까지도.
“사람이 어쩌면 그래?”
그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보의 대답이 전화기 너머에서 명료하게 날아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지혜와 함께,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체념 어린 유머가 섞여 있었다.
“사람이라 그래, 자기야.”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허를 찔린 듯한 충격을 주었다. 김경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수많은 이론과 개념으로 무장했던 그의 지성이 이 짧고 명쾌한 문장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사람이라 그래.’
그것은 변명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가장 정직한 진단이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모순적이고, 나약하며, 때로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것이 우리의 조건이고, 우리의 한계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향한 끝없는 실망과 비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4. 인간이라는 이름의 주석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람이라 그래.’ 그 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은 면죄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존재의 무게에 대한 확인이었다. 한때 마음을 치유하는 ‘심의(心醫)’를 꿈꿨던 그는 어쩌면 가장 깊은 치유는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이 불완전함에 대한 담담한 수용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깨달음에 대한 짧은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낮고 차분해져 있었다.
‘제목: 인간이라는 변명.
‘사람이 어쩌면 그래?’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답은 ‘사람이라 그래’이다. 이것은 합리화나 변명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순성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천사와 악마, 이성과 본능, 이타심과 이기심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존재다.
박민준의 행동은 비겁했지만, 그것은 또한 인간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보다, 그 행동 이후의 성찰과 책임이다.
결론: 인간이라는 조건은 우리의 변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될 수는 있다.’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도시의 불빛들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인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그 모든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