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슈죠의 우연성
필연. 우리는 이 단어를 얼마나 갈망하는가.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 당신과 내가 만나 사랑하는 이유, 이 모든 혼돈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거대한 질서와 목적. 우리는 삶이라는 무작위 해 보이는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라는 이름의 실을 꿰어 서사를 만들려 애쓴다. 마치 운명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만약 이 모든 것이 그저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라면 어떨까. 수억만 개의 가능한 세계 중, 우연히 실현된 단 하나의 현실이라면. 당신의 존재, 나의 존재, 우리의 만남. 이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닌, 아슬아슬한 우연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절망해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이 기적 같은 우연을 사랑해야 할까. 이것은 그 질문 앞에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눈부신 가을날의 기록이다.
1. 가을, 감각의 교향곡
김경훈은 교정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을의 절정이었다. 공기는 차갑지만 건조했고, 햇살은 그가 ‘딸의 볕’이라 부르던,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부드럽게 감싸 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호기심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치 눈으로 보는 사람처럼, 햇살의 온기가 내려앉는 방향을 향해 얼굴을 두었다. 그의 뺨 위로, 태양이라는 거대한 항성이 보내는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발치에는 안내견 탱고가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녀석의 윤기 나는 금빛 털 위로, 나뭇잎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부서져 내리며 작은 금가루처럼 반짝였다. (물론 이것은 그의 기억과 상상력이 빚어낸 이미지였다. 그는 15살까지 보았던 수많은 레브라도 리트리버의 이미지를 탱고의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체온 위에 겹쳐놓고 있었다.) 탱고는 간헐적으로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의 소리 정보를 수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농구공이 바닥에 튀는 둔탁한 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마른 낙엽 구르는 소리,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캠퍼스 어딘가에서 연습 중인 밴드의 서툰 드럼 비트. 김경훈에게 이 모든 소리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연주하는 하나의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교향곡이었다.
그는 옆에 놓아둔 가죽 가방을 더듬어, 보온병을 꺼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향기가 가을 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그가 보온병 뚜껑을 여는 소리에 탱고가 고개를 들었다. 김경훈은 웃으며 말했다. “네 건 없어, 임마. 조금만 참아. 산책 끝나고 맛있는 거 줄게.” 탱고는 그의 목소리 톤만으로도 그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아채고, 만족스러운 듯 다시 턱을 앞발에 괴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 평화로운 순간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그는 지금, 완벽하게 ‘현재’에 존재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이 오직 이 순간의 감각들 – 햇살의 온기, 커피의 향, 탱고의 숨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삶의 소음들 – 만이 그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행복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2. 우연이라는 이름의 균열
바로 그때였다. 그의 평온한 세계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던져졌다.
“어머, 탱고 아니니? 아이고, 이 녀석. 여전히 잘생겼네.”
목소리의 주인은 은퇴한 지 몇 해 된, 이석현 교수였다. 그는 김경훈의 학부 시절 지도교수였고, 지금도 가끔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 노학자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깐깐함과 함께, 제자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 있었다.
김경훈은 반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산책 나오셨어요?”
“으응. 자네도 날이 좋아서 나왔나 보구먼.” 이 교수는 허리를 숙여 탱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탱고는 익숙한 손길에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 녀석이랑 자네는 정말… 천생연분이야.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녀석을 만났을까 몰라. 이것도 보통 인연이 아니지.”
이 교수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겠지만, 그 말은 김경훈의 내면에 예상치 못한 파문을 일으켰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녀석을 만났을까.’ 그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던져본 적이 없었다. 탱고는 그에게 너무나 당연한 존재, 그의 삶의 일부, 그의 또 다른 눈이자 발이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와 헤어지고 다시 벤치에 앉았을 때, 그의 머릿속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그는 탱고를 만났던 과정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안내견 학교에 입학 신청서를 내고, 수개월을 기다렸던 시간. 수많은 예비 안내견들 중에서 그리고 수많은 시각장애인 신청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탱고’라는 이름의 이 레브라도 리트리버와 ‘김경훈’이라는 이름의 연구원이 파트너로 맺어진 확률. 그것은 과연 얼마였을까.
탱고의 부모견, 그 부모견의 부모견… 수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유전자의 계보. 탱고를 훈련시킨 훈련사의 성격과 철학. 탱고가 예비 안내견 시절을 보냈던 위탁 가정의 환경. 그리고 김경훈 자신이 안내견 신청서를 냈던 바로 그 ‘타이밍’. 만약 그가 한 달만 늦게 신청했더라면? 만약 탱고가 훈련 과정에서 다른 기질을 보였더라면? 만약 최종 매칭 심사에서 다른 결과가 나왔더라면? 수천, 수만 개의 변수들. 그중 단 하나라도 달랐다면,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것은 탱고가 아닌 다른 개였을 것이다. 혹은 아예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늘 세상을 ‘시스템’과 ‘확률’의 관점에서 분석해 왔음을 깨달았다. 경영학과 경제학, 문헌정보학적 사고방식은 그에게 세상을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보도록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놓인 이 ‘탱고와의 만남’이라는 사건은 그 어떤 확률론적 모델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우연’의 산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일본의 철학자 구키 슈조를 떠올렸다. 그가 말했던 ‘우연성(偶然性)’. 법칙에 반하는 예외(논리적 우연), 만날 리 없는 것들의 만남(경험적 우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의 존재(형이상학적 우연). 탱고와의 만남은 이 세 가지 우연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맹인 안내견 시스템이라는 법칙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특별한 매칭(논리적), 수많은 개와 수많은 인간 중 하필 이 둘의 조우(경험적), 그리고 애초에 탱고나 김경훈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우주에 없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형이상학적).
이 모든 것이 필연이 아니라면? 그저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가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우연히’ 실현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 관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깊은 유대감과 신뢰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의 머릿속은 차가운 혼란에 휩싸였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깊은 사색에 잠긴 철학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탱고가 그의 무릎에 턱을 괴며, 그의 혼란을 감지한 듯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는 볼 수 없었지만, 그렇게 느꼈다.)
3. 우연을 사랑하는 법(Amor Fati)
“무슨 생각해, 자기? 표정이 왜 이렇게 심각해?”
보보의 목소리가 그의 혼란 속으로 명랑하게 뛰어들었다. 그녀는 그의 옆에 가볍게 앉으며, 그의 손에 따뜻한 캔커피를 쥐여주었다. 그녀에게서는 늘 그렇듯, 그가 좋아하는 오래된 책 냄새와 그녀만의 지적인 향기가 났다. 그녀는 방금 전 이 교수와의 대화와 그의 표정 변화를 멀리서 지켜본 모양이었다.
김경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생각들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탱고와의 만남이 어쩌면 필연이 아닌 우연일 수 있다는 불안감, 그 우연성 앞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허무함.
보보는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철학 박사다운 명료함과 연상의 연인이 가진 따뜻함으로 대답했다.
“구키 슈조가 말했잖아, 자기야.”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우연은 확률과는 다른 거라고. 확률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계산이지만, 우연은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한 이야기야. 중요한 건, 왜 하필 이 우연이 일어났는가를 따지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바로 ‘이것’이 실현되었고, 지금 내 손안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지.”
그녀는 그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우리의 만남도 마찬가지 아니야? 우리가 만날 확률?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희박했겠지. 당신이 그 세미나에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카페에 가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만약’들이 있었잖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만났고, 지금 함께 있잖아. 구키는 그걸 ‘운명애(運命愛, Amor Fati)’라고 불렀어. 이 우연히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사랑하자는 태도. 왜냐하면 이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이니까.”
그녀의 말은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운명애. Amor Fati.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긍정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지금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가 눈부시게 빛난다는 역설.
그는 자신의 옆에 엎드린 탱고를 다시 생각했다. 이 녀석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 그의 곁에 있는 이 특정한 존재, ‘탱고’를 더없이 소중하고 대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의 심장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불안이나 허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사였고, 깊은 애정이었으며, 이 우연한 만남을 기꺼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조용한 결단이었다. 그의 얼굴에 다시, 이전보다 더 깊고 따뜻해진 미소가 돌아왔다.
4. 존재의 주석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탱고는 그의 왼쪽에서 늘 그렇듯 반 발짝 앞에서 그의 길을 안내했다. 그의 손에 전해져 오는 하네스의 미세한 움직임, 탱고의 발이 낙엽을 밟는 소리, 녀석의 규칙적인 숨소리. 이 모든 감각들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들은 더 이상 당연한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지금 이 순간, 그와 탱고라는 두 존재가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단 하나뿐인 우연의 증거였다.
그들은 캠퍼스를 벗어나, 그들이 자주 가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 카페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커피 볶는 냄새, 그리고 낮은 볼륨의 재즈 음악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보보와 나란히 앉아, 그녀가 주문한 캐러멜 마키아토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자신의 아이폰을 꺼냈다.
그는 오늘의 길었던 사유와 그 끝에서 만난 작은 깨달음에 대한 주석을 음성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유쾌함과 함께, 존재의 무게와 가벼움을 동시에 이해하게 된 자의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제목: 어쩌다 마주친 그 개 – 우연성에 대한 단상.
우리는 필연이라는 이름의 각본을 갈망하지만, 삶은 우연이라는 이름의 즉흥 연주에 가깝다. 탱고와의 만남. 그것은 확률로 설명될 수 없는 무수한 가능성 중 단 하나가 기적처럼 실현된 사건이다. 구키 슈조는 이를 ‘형이상학적 우연’이라 불렀다.
이것이 필연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존재의 유일무이함과 소중함을 증명한다. 다른 개가 아닌 바로 ‘탱고’이기에,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보보’이기에, 나의 이 불완전한 삶은 의미를 갖는다.
운명애(Amor Fati). 그것은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체념이 아니라, 이 우연한 현실이야말로 내가 가진 전부임을 깨닫고, 그것을 기꺼이 긍정하고 사랑하겠다는 능동적인 결단이다.
결론: 내 가방은 내가 샀으니 내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하다. 수많은 가방 중에서 하필 ‘그 가방’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설명 불가능한 우연의 결과다. 그러니 당신의 낡은 가방을, 당신 곁의 사람을, 그리고 당신 자신을 오늘, 조금 더 사랑해 주자.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적이니까.’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미소 짓고 있을 보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발치에서 느껴지는 탱고의 따뜻한 체온에 가만히 집중했다. 그의 우주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했지만, 이제 그는 그 불확실성마저도 기꺼이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우연한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