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패턴(Pattern)을 갈망한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려는 이 끈질긴 본능은 어쩌면 생존 그 자체와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별들의 무작위한 흩뿌려짐 속에서 기어코 별자리를 그려내고, 의미 없는 소음의 나열 속에서 리듬과 멜로디를 발견하며, 한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성격’이라는 이름의 일관된 코드를 찾아내려 애쓴다. 패턴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나는 이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라는 어쩌면 가장 거대한 착각이자 가장 절실한 위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토록 신뢰하는 그 패턴들이 사실은 정교한 거짓말이라면 어떨까. 우리의 눈을 속이기 위해, 혹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위해 설계된, 화려하고도 치명적인 위장이라면. 우리는 종종 덤불 속에 숨은 표범의 점무늬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가장 큰 미스터리는 덤불 속이 아닌, 탁 트인 초원 한복판에서 ‘나 여기 있소’ 하고 외치는 듯한, 저 얼룩말의 요란한 줄무늬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패턴인가. 포식자를 향한 대담한 도발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해독하지 못한, 더 깊은 차원의 암호인가. 이것은 그 암호를,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풀어내려 한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눈부신 가을날의 기록이다.
1. 감각의 아키텍처
대구수목원의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계절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피어난 국화의 짙은 향기가 마른 흙냄새와 차가운 바람에 실려와 김경훈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보보의 손을 잡고,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호기심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발치에서 이 모든 평화에 완벽하게 동기화된 안내견 탱고가 꼬리를 낮게 흔들며 그의 반 보 앞에서 길을 이끌었다.
김경훈은 이 공간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읽고’ 있었다.
그의 발바닥은 촘촘한 보도블록의 질감과, 낙엽이 푹신하게 쌓인 흙길의 경계를 정확히 구분해 냈다. 그의 귀는 왼쪽 숲에서 들려오는 직박구리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오른쪽 연못에서 들려오는 물오리들의 둔탁한 물장구 소리로 공간의 깊이와 방향을 측정했다. 그리고 그의 피부는 15년의 시각적 기억 속에 ‘딸의 볕’이라 저장된,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에서 내리쬐는 따사롭고 부드러운 햇살의 입자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감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조합하여, 머릿속에 이 수목원의 완벽한 3D 지도를 렌더링 하고 있었다.
“자기야, 저기 봐.”
그의 곁을 걷던 보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 풍경을 그와 공유하고 싶은 즐거운 설렘이 담겨 있었다.
“저 나무, 단풍나무 같은데… 잎이 완전 불타는 것 같아. 새빨간색. 당신 기억 속에 있는 그 ‘빨간색’ 중에 제일 강렬한 거, 그거 떠올리면 돼.”
김경훈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유쾌한 입담을 닮아 있었다.
“오, 그래? 나는 지금 당신 목소리 톤에서 ‘빨간색’을 보고 있어. 톤이 평소보다 반 키 정도 올라갔거든. 그리고 방금 내 손을 잡은 당신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는데, 그 압력에서도 ‘빨간색’이 느껴지네. 이쪽이 훨씬 더 정확한 데이터 같은데?”
“뭐래는 거야, 정말.” 보보가 웃으며 그의 팔을 쳤다. “당신은 정말… 모든 걸 그렇게 해체해야 직성이 풀리지? 그냥 ‘아름답다’고 느끼면 안 돼?”
“아니, 이게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방식이라니까.”
그는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는 그녀의 시각 정보가 아니라, 그녀가 그 정보를 처리하며 발생하는 이 모든 미세한 반응들을 사랑했다. 그는 그녀가 입은 스웨터의 색깔은 몰랐지만, 그 부드러운 캐시미어의 감촉과,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복숭아 향 샴푸 냄새를 알았다. 그것이 그가 보보라는 존재를 식별하는 그만의 고유한 ‘패턴’이었다.
“당신이나 나나, 결국 패턴에 집착하는 건 똑같아.”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색깔과 형태라는 패턴에 감탄하고, 나는 내 손끝과 콧구멍, 귓구멍으로 들어오는 패턴에 감탄할 뿐이지. 솔직히 말해서 내 쪽 패턴이 훨씬 더 다층적이고 신뢰할 만하다고. 시각만큼 기만적인 감각도 없잖아?”
“어이구, 소설에 나오는 드래곤 나셨네.” 보보가 받아쳤다. “인간의 감각이란 다 불완전하다고 설교하시겠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저기 벤치에 가서 커피나 좀 마시자. 당신의 그 잘난 후각으로, 내가 방금 산 이 커피가 케냐산인지 콜롬비아산인지 맞혀보시든가.”
그들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탱고가 그의 발밑에 턱을 괴고 눕자, 김경훈은 보보가 건넨 따뜻한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깊은 산미와 초콜릿 향. 그는 이 복잡한 패턴을 음미하며, 이 순간의 평화에 깊이 안도했다. 그의 연구실은 언제나 완벽한 질서의 공간이었지만, 그가 진짜 살아있음을 느끼는 곳은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소리와 냄새와 온기가 가득한, 혼돈스러운 바깥세상이었다.
2. 튜링의 방정식
“아, 맞다. 자기야.”
보보가 문득 생각난 듯, 자신의 아이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야. 어젯밤에 읽었는데, ‘패턴’에 대한 거거든. 당신이 그렇게 신봉하는 ‘시스템’과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
그녀는 아이폰 화면낭독기 모드를 켜서(그녀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이 기능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앨런 튜링의 ‘반응-확산 모델’에 대한 칼럼을 재생했다. 김경훈의 귀에, 튜링이 동물의 줄무늬나 점박이 무늬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활성화 인자(청군)’와 ‘억제 인자(백군)’의 상호작용이라는 수학적 규칙에 따라 형성된다는 방정식을 제시했다는 내용이 흘러 들어왔다.
김경훈의 얼굴에서 일상의 유쾌함이 옅어지고, ‘연구 모드’의 지적인 흥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의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잠깐, 잠깐만.” 그가 보보의 손을 들어 재생을 멈췄다. “튜링이? 암호 해독하던 그 튜링이 동물무늬를?”
“응. 1952년에. 완전 천재지?”
김경훈은 거의 전율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혼돈스러워 보였던 자연의 모든 패턴들이 하나의 거대한 수학 공식으로 수렴하는 듯했다.
“세상에… 이건… 이건 미쳤잖아. ‘청군’과 ‘백군’이라니. 이건 완벽한 이진법(Binary) 시스템이야. 활성화와 억제. 1과 0. 그 두 가지 신호의 상호작용만으로 표범의 점과 얼룩말의 줄무늬가 만들어진다고? 이건… 이건 신의 설계도를 훔쳐본 거나 다름없잖아.”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떠올렸다. 문헌정보학의 분류 체계, 경제학의 수요-공급 곡선, 경영학의 조직 원리. 그 모든 것의 근원에, 이토록 단순하고도 강력한 이항대립의 법칙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보보가 그의 흥분을 즐기며 덧붙였다. “이 공식이 사람 지문이나, 입천장 무늬(구개추벽)에도 똑같이 적용된대. 소름 돋지 않아?”
김경훈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입천장을 만져보았다. 울퉁불퉁한, 자신만의 고유한 패턴. 그는 환하게 웃었다. “맙소사! 나는 내 지문과 입천장에 튜링의 방정식을 새기고 다녔던 거네! 이거야말로 완벽한 ‘본질’이야. 우리는 모두, 태아 시기부터 이 수학 공식에 따라 디자인된 존재였던 거야.”
그의 흥분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보보가 철학자다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다.
“그건 ‘어떻게(How)’ 만들어졌냐는 거지, 자기가 좋아하는 ‘본질’이 아니야.” 그녀가 쿡 찌르며 말했다. “더 재밌는 건, ‘왜(Why)’ 그렇게 만들어졌냐는 거야. 특히 얼룩말. 튜링의 공식으로 그 무늬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있게 됐지만, 대체 그 요란한 줄무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100년 넘게 싸우고 있대.”
3. 얼룩말의 역설
김경훈의 표정이 다시 흥미진진하게 바뀌었다. “왜라니? 그야 뻔한 거 아니야? 위장(Camouflage).”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보보가 웃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잖아. 그 갈색 초원에서 흑백 줄무늬가 위장이 된다고? 그건 ‘나 여기 있어요’ 하고 광고하는 꼴 아니야? 마치 당신이 지금 이 조용한 수목원에서 혼자 랩을 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눈에 띄는 짓이지.”
“하하, 그렇긴 하네.” 김경훈도 그 비유에 웃었다. “그럼, 뭐. 서로 알아보려고? 사회적 신호?”
“그것도 가설 중 하나래. 개체마다 무늬가 다 다르니까, 일종의 바코드처럼 쓴다는 거지. 근데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아?” 보보가 반문했다. “우리가 서로 알아볼 때 ‘아, 자기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네’ 하고 알아보진 않잖아. 그냥 목소리 듣고, 냄새 맡고, 걷는 모양만 봐도 아는 거지. 얼룩말들이라고 뭐 다르겠어? 굳이 그 복잡한 줄무늬가 필요할까?”
“그럼… 체온 조절? 검은 줄은 열 흡수하고, 흰 줄은 반사하고. 그래서 미세한 대류가 생겨서 시원하다? 으음… 이건 좀… 모 작가가 말한 ‘시급 천 원짜리’ 이론 같은데. 너무 궁색해. 그깟 미세 바람으로 아프리카 더위를 이긴다고?”
“정답!” 보보가 무릎을 쳤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설이 뭔지 알아? 가장 최근에 나온 거. 2025년에 이그노벨상까지 받았대.”
“뭔데? 설마…”
“흡혈 파리 회피설.”
김경훈은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파리? 고작… 파리 때문에?”
“응. 체체파리 같은 흡혈 곤충들! 그 녀석들 시각 시스템이 얼룩말의 줄무늬 패턴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란돼서 착륙을 제대로 못 한다는 거야. 일본에서 검은 소에다 흰 줄무늬를 그렸더니, 진짜로 파리가 80%나 덜 꼬였다는 실험 결과도 있대.”
김경훈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 쳐다볼 정도였다. 탱고조차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푸하하! 이거 정말… 이거 정말 최고잖아! 맙소사!”
그는 웃음을 멈추고, 경이로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얼룩말의 패턴은… 사자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고등 전략이 아니라, 고작 모기나 파리 같은 ‘버그(Bug)’들을 쫓아내기 위한, 일종의 ‘패치(Patch)’였다는 거네?”
이것은 그의 세계관을 뒤흔드는 거대한 발견이었다. 그는 늘 ‘시스템’의 거대한 구조와 ‘본질’의 철학적 의미에 천착해왔다. 하지만 이 얼룩말의 역설은 때로는 가장 거대한 진화가 가장 사소하고 귀찮은 ‘버그’를 수정(Fix)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다시 생각했다. ‘정보 접근성’. 그는 이것을 ‘정의’나 ‘평등’ 같은 거대 담론의 차원에서 접근해 왔다. 하지만 어쩌면, 이 일의 본질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의 일은 그저, 시스템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소하고 짜증 나는 ‘버그’들 – 작동하지 않는 음성 안내, 논리적이지 않은 메뉴 구조, 읽을 수 없는 캡차(CAPTCHA) 코드 – 를 잡는 것에 불과할지도.
“그리고 있잖아,” 보보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더 재밌는 건, 얼룩말 털을 밀면 피부가 검은색이래. 흰 바탕에 검은 줄이 아니라, 검은 바탕에 흰 줄이 생긴 거라는 거지. 북극곰 피부가 검은 것처럼 말이야.”
김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그의 철학을 완벽하게 지지하는 증거였다. 겉으로 보이는 ‘패턴’(흑백 줄무늬)은 현상일 뿐, 그 이면의 ‘본질’(검은 피부)은 숨겨져 있다. 시각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사람들은 그저 흑백의 패턴만을 보지만, 그는 이제 그 패턴이 ‘검은 피부 위에 그려진 흰색 버그 픽스’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4. 인간의 패턴 (로맨스와 주석)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벤치 위로, 수목원의 평화로운 소음과 함께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김경훈의 마음은 방금 들은 이 유쾌하고도 심오한 진실로 인해 따뜻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거대 담론에 집착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세상의 모든 ‘버그’들을 사랑하게 된, 유쾌한 엔지니어에 가까웠다.
그는 손을 뻗어, 보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가락 지문과 손바닥의 손금을 천천히 더듬었다.
“튜링이 이것도 설명했지. 당신만의 고유한 패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 안쪽으로 옮겨갔다. 얇은 피부 아래, 그녀의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튜링도 설명 못 할걸.” 그가 속삭였다. “이건 내 패턴이야. 당신을 식별하는 나만의 바코드.”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는 15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기억 속 이미지는 흐릿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나지막이 고백했다. “나는 당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의 잊어버렸어. 내 기억 속의 당신은 그냥 ‘아름다운 연상의 여성’이라는 아주 게으른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야.”
보보의 숨결이 잠시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의 패턴을 알아. 당신이 지금처럼 당황하거나 감동하면, 숨결이 아주 미세하게 빨라지는 거. 그리고 당신이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오른쪽보다 0.5초 정도 먼저 올라가는 그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지금 내 손끝에서 느껴지는 당신 피부의 이 따뜻한 온도. 내 머릿속의 그 어떤 이미지보다, 지금 이 감촉이 이 소리가 이 온기가… 나에게는 훨씬 더 선명한 당신이야.”
그는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게 나의 활성화 인자(Activator)야, 보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시끄러운 소음들이 억제 인자(Inhibitor)지.”
그들의 입맞춤이 가을 공기 속에서 잠시 깊어졌다.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보보는 숨을 몰아쉬며, 완전히 무장 해제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녀의 가빠진 호흡 소리로 그렇게 확신했다.)
“와….” 그녀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당신 진짜… 선순데? 방금 그거, 내가 들어본 말 중에 제일… 변태 같고, 제일 로맨틱했어. 내 존재를 튜링의 방정식으로 환원해 버리다니. 심지어 날… 파리 쫓는 줄무늬에 비유했잖아!”
김경훈은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그거보다 더한 칭찬이 어딨어? 당신은 내 삶의 모든 ‘버그’들을 쫓아주는 나만의 완벽한 줄무늬라는 거잖아. 사자(세상의 큰 위협)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지만, 깔따구(일상의 자잘한 불안)는 당신 없으면 못 막는다고. 그거 완전 찰떡같은 비유 아니야?”
보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의 팔짱을 더욱 세게 끼었다. 그녀는 그의 이런, 가장 복잡한 철학을 가장 유쾌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방식을 사랑했다.
5. 주석: 버그 만세
그들은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탱고가 앞장서고, 두 사람은 그 뒤를 따랐다. 김경훈은 아이폰을 꺼내, 오늘의 이 거대한 발견을 잊지 않기 위해 음성 메모를 남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을 햇살보다 더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목: 줄무늬가 우리를 구원할지니, 혹은 버그 픽스 예찬.
우리는 거대한 패턴(본질, 목적, 사명)에 집착하지만, 어쩌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가장 사소하고 귀찮은 ‘버그(Bug)’일지도 모른다. 얼룩말의 줄무늬는 사자를 위한 위장이 아니라, 파리를 위한 기피제다. 가장 위대한 진화는 가장 귀찮은 버그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정보 접근성도 마찬가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사용자를 괴롭히는 사소한 ‘파리’들을 잡는 것. 그것이 본질이다.
결론: 나의 장애는 시스템의 ‘버그’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이라는 단일 감각에만 의존하는 이 멍청한 세상의 ‘버그’를 드러내는 리트머스지다. 나는 세상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버그를 수정(Fix)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보보는 내 삶의 모든 버그를 잡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줄무늬다. 심지어 검은 피부에 흰 줄이다. 완벽하다.’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보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 불완전하고 버그투성이인, 그래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세상을 향해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