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오뚝이
우리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오해한다. 우리는 그것을 ‘상태(State)’라고 착각한다. 긍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찬, 마치 캘리포니아의 날씨처럼 쾌청하고 안락한 마음의 상태. 그리하여 우리는 그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최악의 상황(Plan B)을 먼저 떠올리고 마는 이 비관적인 뇌를 자책하고 비난한다. ‘나는 왜 이렇게 부정적일까.’
그러나 만약, 희망이 ‘상태’가 아니라, ‘근육(Muscle)’이라면 어떨까.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매일의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힘(Power)이라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을 갈망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종종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시한부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절대로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플랜 B’가 없었다는 그 숭고한 선언.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는 이름의 신비주의로 분류하고, 합리적인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일이라 선을 긋는다. 하지만 그것이 신비가 아니라, ‘플랜 A’가 99%의 확률로 작동하는 지극히 건강하고 운이 좋은 사람들의 ‘사치’라면 어떨까.
만약, 당신의 ‘플랜 A’가 늘 지연되고, 취소되고, 오류를 일으킨다면? 만약 당신의 생존 자체가 수백 개의 ‘플랜 B’와 ‘플랜 C’로 아슬아슬하게 직조된 그물망 위에 놓여 있다면? ‘플랜 B가 없는 삶’은 축복이 아니라,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불안,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은 그 ‘희망이라는 근육’을 단련하는 법을 잊어버린 한 여자와, ‘플랜 B’라는 이름의 고통스러운 근육으로 평생을 버텨온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늦가을 비 오는 날의 두 번째 기록이다.
1. 경계 너머의 도시, 회색의 재회
KTX 열차가 경부선 철로 위를 매끄럽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김경훈은 특실 창가 자리에 앉아, 이 진동과 소음의 아키텍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목적지인 서울까지, 1시간 45분이라는 이 완벽하게 통제된 시간의 터널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 ‘플랜 A’의 평온함을 획득하기까지, 그는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유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미소 아래에는 J형 인간 특유의, 방금 막 완수된 작전의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열리는 ‘정보 격차 해소 포럼’에 11시 45분까지 도착해야 했다. KTX 예약은 완벽했다. 문제는 ‘집에서 동대구역까지’라는 그에게는 언제나 가장 예측 불가능한 변수로 가득 찬 구간이었다.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장애인 콜택시를 무려 2시간 전인 8시에 예약해 두었다. 그것이 그의 ‘플랜 A’였다. 하지만 택시는 8시 20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앞선 배차가 늦어져서요.’ 언제나 듣는 시스템의 무책임한 변명이었다.
그 20분 동안, 그의 머릿속은 수백 개의 ‘플랜 B’ 시나리오를 동시에 구동시켰다. ‘지금 당장 카카오 T로 일반 택시를 부를까? 하지만 탱고를 태워줄지 알 수 없다.’ ‘보보에게 전화할까? 아니야, 그녀는 오늘 아침 강의가 있어.’ ‘만약 이 기차를 놓치면? 서울 포럼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플랜 B-1), 다음 기차표를 예매한다(플랜 B-2).’ 그는 이 모든 과정을, 땀으로 축축해진 손으로 아이폰을 쥔 채, 1초 만에 시뮬레이션했다.
결국 그는 기차역에 1시간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시스템의 오류를, 자신의 과도한 ‘미리 준비함’으로 메운 것이다. 그는 이것이 J형 인간의 강박이 아니라, ‘플랜 A’가 늘 자신을 배신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시각장애인의 필수 생존 전략임을 알았다.
그는 이 피로한 아침의 끝에,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오뚝이’.
그는 아이폰 화면낭독기를 통해, 그녀가 어젯밤 브런치에 올린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글을 다시 한번 ‘들었다’.
‘... 나는 왜 이렇게 부정적일까 생각한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플랜 비를 세운다...’
김경훈은 이 문장에서 지난번 신림동에서 만났던 그녀의 핼쑥한 얼굴과, 그 안에서 절망하던 자신의 과거를 동시에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올린 글의 마지막 문장.
‘... 그런 좋은 생각들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겠다.’
그는 이 기도가 그가 3년간의 병원 생활 동안 매일 밤 올렸던 기도와 얼마나 닮아있는지 생각했다. 그는 오늘, 그녀에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그것은 ‘희망을 가지라’는 값싼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플랜 B’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주 사적인 면죄부였다.
2. ‘오뚝이’라는 이름의 실존, 그 두 번째 고백
약속 장소는 신촌역 근처, 그녀가 요즘 자주 간다는 스터디 카페의 1층에 딸린, 이름 없는 작은 카페였다. 공기 중에는 눅눅한 책 냄새와,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과도하게 볶은 탄 맛이 나는 원두 냄새가 가득했다. ‘오뚝이’ 선배, 그녀는 창가 가장 구석진, 콘센트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몇 주 전 신림동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형광등 불빛 아래 더욱 창백했고, 굵은 뿔테 안경 너머의 눈은 밤샘 공부와 악몽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늘어난 회색 후드 티셔츠 차림이었고,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키보다 더 높이 쌓인 법전과 요약 노트들, 그리고 이미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한 갈색 물이 되어버린 거대한 사이즈의 아이스 아키(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오뚝이’라는 필명처럼, 쓰러질 듯하면서도 위태롭게 앉아, 앙상한 손가락으로 볼펜을 ‘딱, 딱, 딱’ 초조하게 누르고 있었다.
“경훈아!” 그녀가 그를 발견하고, 아주 잠시, 진심으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세 피로감으로 덮였다. “세상에, 네가 이 지옥 불 구덩이까지 또 웬일이야? 탱고, 탱고! 너는 여전하구나. 아이고, 이 녀석, 너는 변호사 시험 같은 거 안 쳐서 좋겠다. 그렇지?” 그녀가 탱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억지로 유쾌한 척 농담을 건넸다.
김경훈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특유의 따뜻하고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치열하시네요. 이 동네 ‘최종 보스’ 포스가….”
“야, 놀리지 마.” 그녀가 손사래를 쳤지만, 그의 방문이 싫지는 않은 듯했다. “커피 마실래? 뭐, 여기 커피 맛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내가 살게.”
“됐어요.” 김경훈이 웃었다. “오늘은 제가 샀어요. 오는 길에.” 그는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보보가 아침에 내려준 케냐 원두. 선배 맛 보여주려고 싸왔어요. 선배 글 보니까, 맨날 맛도 모르는 커피만 마시는 것 같아서요. 맛없고 쓴 커피는 인생만으로도 족하잖아요.”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서 애써 지었던 미소가 잠시 무너졌다. 그녀는 컵을 받아 들고, 그 따뜻한 온기를 가만히 느꼈다.
“... 고맙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여전히… 그렇게 다정하시구나.”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게… 이게 커피야? 내가 알던 거랑은 완전 다른데. 과일 향이 나네.”
“그쵸? 이게 바로 ‘떼루아’라는 겁니다. 좋은 원두는 시스템(강배전)이 아니라, 땅(본질)의 맛을 내거든요.” 그가 유쾌하게 받아쳤다.
따뜻한 커피가 몇 모금 들어가자,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도 조금은 녹아내린 듯했다.
“... 글 봤다며.” 그녀가 툭, 던지듯 말했다.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네. 무슨 중2병 걸린 애처럼 기도문이나 쓰고. 심지어 오늘 아침엔, 그 글 보고 어떤 분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 된다’는 식의 댓글을 달았는데… 와, 정말. 긍정적인 생각이 안 드는데 어떡하라고! 그게 더 사람 미치게 하더라.”
그녀는 볼펜을 더 세게 눌렀다.
“어젯밤에도 악몽을 꿨어.” 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고백했다. “꿈에서 내가… 강사한테 상담을 받고 있더라고. 지금 내 진도가 늦었는지, 이대로 가면 붙을 수 있는지. 근데 그 강사가 나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차는 거야. ‘오뚝이 씨는 올해도 틀렸네요.’ 이러는데… 와, 정말. 꿈에서조차 그렇게 팩트 폭력을 당해야겠냐.”
그녀는 커피 잔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일어나면 기분이 묘하게 나쁜 정도가 아니야. 그냥… 잔 것 같지가 않아. 자는 동안에도 노동을 한 기분이야. 왜 인간은 이렇게 비효율적일까? ON/OFF 스위치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냥 내가 원할 때 딱! 끄고, 공부 다 끝나면 다시 딱! 켤 수 있게.”
3. 플랜 B
김경훈은 그녀의 절박한 농담에 웃을 수가 없었다. 스위치를 끄고 싶다는 그 열망. 그는 자신의 과거, 그 지독했던 공황과 불안의 터널을 떠올렸다.
그는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선배 글에서 ‘ON/OFF 스위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죠. 저도 매일 밤 그걸 기도했어요. 제발 이 끔찍한 경보음 좀 꺼달라고. ‘렉사프로’(항우울제) 없이는 아침에 눈을 뜰 수가 없었고, 호흡이 가빠질 때마다 벤조디아제핀 계열 신경 안정제를 혀 밑에 녹여야 했어요. 그 약의 차갑고 쓴 금속성 맛이… 아직도 기억나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선배’의 그것이 아닌,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동료’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 김경훈이 말을 이었다. “저는 선배의 그 ‘플랜 B’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어요.”
“플랜 B?”
“네. 선배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플랜 비를 세운다’는 게, 자신이 부정적이라서 그렇다고 자책하셨잖아요. 그 시한부 환자처럼 ‘플랜 A(완치)’만 믿어야 하는데, 자꾸 ‘플랜 B(죽음, 혹은 실패)’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 그렇지. 그게 내 문제인 것 같아.”
“아니요, 선배.” 김경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미소보다 더 따뜻한, 깊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건, 아주 건강하고 운이 좋은 사람들, ‘플랜 A’가 99%의 확률로 작동하는 사람들의 ‘사치’ 예요.”
그는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한때 꿈꿨던 사제의 목소리처럼,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플랜 A’가 늘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들에게, ‘플랜 B’는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에요. 그건 ‘생존 전략’이에요. 그건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요.”
그는 그녀에게 오늘 아침, 동대구역으로 오던 길의 그 아찔했던 20분을 이야기했다.
“선배. 나는 J형 인간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에요. J형이 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기차역에 1시간 30분 일찍 도착해요. 그게 내 ‘플랜 A’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나의 ‘플랜 B’ 예요. 아니, 그건 플랜 A-2죠. 플랜 B는 아예 서울행을 포기하고 보보에게 전화해서 다음 일정을 다 취소하는 거였어요. 나는 내 삶은 언제나 플랜 B, C, D를 안고 살아가지 않으면 단 하루도 작동하지 않아요.”
그는 이 논의가 그의 실존과 직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혼자 여행 갈 때, 왜 음식을 안 먹는지 알아요? 식당이 문 닫았을까 봐? 그것도 맞죠. 미리 전화해서 영업시간을 확인하는 게 내 플랜 B-1이에요. 진짜 이유는 밥을 먹고 났을 때, 내가 탱고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을 못 찾으면 어떡할까. 그게 무서워서예요. 그래서 내 ‘플랜 A’는 아예 ‘먹지 않는다’가 되는 거예요. 선배 눈에는 이게 부정적으로 보여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왜 공황장애를 겪었는지 아세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격해졌다. “스토킹 때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아니에요. 그건 방아쇠였을 뿐. 나는 그전부터… 15살 이후로 단 하루도, 플랜 A만 가지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내 삶은 언제나, 택시가 안 오거나, 길이 막히거나, 교수가 날 이해 못 하거나, 시스템이 날 거부하는 수백 개의 플랜 B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어 왔어요. 그 불안이 이미 한계치까지 쌓여 있었는데, 스토커라는 놈이 내 마지막 안전망(집)까지 흔들어대니까… 그게 그냥, 터져버린 거예요. ‘플랜 A만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내 몸의 절규였죠.”
4. 희망이라는 근육, 그리고 기도
그는 가빠진 숨을 골랐다. 그의 고백에, 카페 안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선배가 불안한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왔다. “플랜 B를 세워서가 아니에요. 선배는 플랜 B가 없는 ‘플랜 A’의 세계(기적, 완치, 무조건적 합격)를 억지로 믿으려고 하니까 불안한 거예요. 그 시한부 환자처럼, '기적'을 기다리니까. 그건 희망이 아니에요. 그건 ‘도박’이지. 그리고 선배의 몸은 그 도박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는 거고요.”
그는 그녀의 글 마지막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선배가 어젯밤에 쓴 그 기도는 그래서 위대해요.”
“... 뭐가?”
“선배는 ‘합격하게 해 주세요’라는 결과(플랜 A)를 기도하지 않았잖아요. 선배는 ‘그런 좋은 생각들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건, ‘희망’이라는 결과를 구하는 게 아니라,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그 ‘근육’을 구한 거예요.”
그는 그녀의 손을 테이블 위로 끌어당겨 가볍게 쥐었다.
“희망은 상태가 아니라 근육이에요, 선배. 가만히 있으면 생기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단련해야 하는 근육이라고요. 지금 선배는 그 근육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예요. 그런데 억지로 100kg짜리 긍정을 들어 올리려고 하니까 당연히 에너지가 고갈되죠. 지금 선배한테 필요한 건 ‘할 수 있다’는 구호가 아니라, 그 근육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아주 작은 ‘재활 훈련’이에요.”
5. 가장 작은 산
“재활 훈련…?”
“네. 예를 들면… 지금 당장 이 지옥 같은 카페를 나가는 거.” 김경훈이 유쾌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선배. 커피 맛도 모른다면서 이런 쓴 것만 마시니까 악몽이나 꾸는 겁니다.”
“어딜?”
“선배 글 보니까, ‘좀 걸어야 할 것 같으면 먼 곳으로 간다’면서요. 지금이 바로 그 ‘먼 곳’으로 갈 시간이에요. 오늘은 내가 선배 ‘플랜 B’가 되어 줄게요.”
그는 탱고의 하네스를 잡고, 그녀를 카페 밖으로 이끌었다. 비는 그쳤지만,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어디 가는데?” 그녀가 불안한 듯 물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스케줄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늘, 선배가 오르기로 계획했던 ‘산’(공부 계획)은 잊어버려요. 존 듀이가 그랬다면서요. 산에 오르는 건, 다음 산을 보기 위해서라고. 지금 선배는 너무 높은 산만 보느라, 발밑의 돌부리도 못 보고 있어요. 오늘은 아주 작은 산, ‘김경훈이랑 진짜 맛있는 커피 마시기’라는 산부터 오르는 겁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그가 서울에서 학회에 올 때마다 들르곤 하는 광화문 근처의 작은 스페셜티 커피 바로 향했다. 그곳은 신림동과는 완전히 다른, 잘 볶인 원두의 화사한 과일 향과, 나지막한 재즈 음악, 그리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살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맛있어서’ 마시는 커피를 경험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에서 나는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꽃향기와 레몬의 산미에, 그녀는 낯설어하면서도 아이처럼 신기해했다.
그들이 헤어질 무렵,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붉게 충혈되었던 눈빛은 조금이나마 차분해져 있었다.
“고맙다, 경훈아. 커피도, 그리고… 네 이야기도.”
“별말씀을요, 선배. 대신, 다음엔 선배가 변호사 돼서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제일 비싼 걸로.”
6. 주석: 우리 모두의 ‘플랜 A’
그날 밤, 대구로 돌아오는 KTX 특실 안. 김경훈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차분하고 충만했다. 그는 오늘, 한때의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영혼을 만났고, 어설프게나마 그가 꿈꾸던 ‘심의(心醫)’의 역할을 해낸 것 같았다.
그의 아이폰이 부드럽게 진동했다. 보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유쾌했다.
“자기야! 포럼은 잘 끝났어? 내 선물은?”
“선물?”
“응. 어제 내가 말했잖아. 서울 간 김에, 내가 좋아하는 그 빵집에서 크루아상 좀 사 오라고.”
김경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오뚝이 선배와의 만남에 몰두하느라.
“아… 보보. 그게…”
“까먹었구나, 김경훈.” 그녀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변했다. “됐어. 당신은 그냥… 당신의 그 숭고한 ‘인류애’랑 사세요. 나는 내일 혼자 빵 사 먹을 테니까.”
‘뚝.’ 전화가 끊겼다.
김경훈은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망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보보의 분노를 풀 플랜 B’를 세우기 위한 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이 복잡한 여정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그의 목소리는 유쾌함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제목: 희망의 아키텍처, 혹은 플랜 B의 당위성.
존 듀이는 ‘다음 산’을 보라고 했다. 하지만 맹인에게, 혹은 벼랑 끝에 선 수험생에게, 그 ‘다음 산’은 보이지 않는다.
시한부 환자의 ‘기적’은 아름답지만, 위험한 서사다. 그것은 ‘플랜 B’를 포기한 자의 승리가 아니라, 애초에 ‘플랜 B’가 필요 없는 축복받은 자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나의 삶, 그리고 오뚝이 선배의 삶은 ‘플랜 B’의 아키텍처로 지어져 있다. 플랜 B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생존의 증거다. 그것은 불안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을 제어하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결론: ‘희망’은 ‘플랜 A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긍정이 아니다. 희망이란, ‘플랜 A가 망하더라도, 나의 플랜 B, C, D가 나를 어떻게든 살게 할 것’이라는 나 자신과 나의 세계에 대한 끈질긴 신뢰다.
…그리고 때로는 ‘보보’라는 이름의, 내가 미처 계획하지 못한 가장 완벽한 플랜 Z가 내 모든 불안을 잠재우기도 한다.
…아, 젠장. 지금 당장 동대구역 도착하면, 보보가 좋아하는 케이크 가게 문 닫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가장 시급한, 플랜 B다. 주여….’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