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 페루 헬리오트로프
오늘은 아주 독특한 친구가 방문했다.
알코올의 거친 노크 소리 없이 물(Water-based)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불리 1803’ 가문의 ‘페루 헬리오트로프’다.
이 친구는 향수라기보다, 피부에 머무는 하나의 고요한 기운, 혹은 19세기에서 날아온 아기 유령과도 같다.
과연 이 고풍스러운 유령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비판적인 고고학자의 마음으로 그 실체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이 친구는 탑-미들-베이스로 변신하며 사람을 현혹하는 재주가 없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본모습 하나만을 고집스럽게 보여준다.
그 본모습이란, 바로 ‘파우더’다.
헬리오트로프라는 이름의 꽃이 그 주인공인데, 이 꽃은 본래 아몬드와 바닐라를 닮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 ‘꽃’의 정체성을 잊은 듯,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곱게 빻은 앤티크 분첩의 냄새를 풍긴다.
그의 곁에는 바이올렛(제비꽃)과 통카빈이라는 조력자들이 있다.
바이올렛은 이 파우더 향에 먼지 쌓인 듯한, 고풍스러운 화장대의 느낌을 더하고, 통카빈은 바닐라처럼 달콤하게 마무리하며 이 아기 유령을 포근한 담요로 감싼다.
이들의 조합은 결국 ‘갓 태어난 아기’와 ‘100년 된 할머니의 화장대’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이미지를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이 향기는 비판적으로 보자면, ‘꽃’이라는 이름의 사기극이다.
그는 페루의 야생에서 자라난 이국적인 꽃이 아니라, 19세기 파리의 가장 호화로운 침실(Boudoir)에서 태어난, 세상 물정 모르는 아기 유령이다.
그의 향기는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연약하며, 너무나 안락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
그의 곁에 있으면 모든 긴장이 풀리지만, 동시에 밖으로 나가고 싶은 모험심마저 거세당하는 기분이다.
최종 결론.
‘페루 헬리오트로프’는 외출을 위한 향수가 아니라, 가장 사적인 공간을 위한 향기다.
그는 위로의 화신이지만, 동시에 그 위로 속에 안주하게 만드는 달콤한 감옥이다.
그의 향기는 ‘만질 수 있는 부드러움’ 그 자체다.
하지만 이 아기 유령과는 산책을 하거나 춤을 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그가 잠든 요람을, 조용히 구경하다 나올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