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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말,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by 김경훈


1. 향수 설명

‘여인의 초상’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졌지만, 그 실체는 향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압도적인 오리엔탈 플로럴 향수 중 하나다.

천재 조향사 도미니크 로피옹(Dominique Ropion)의 걸작으로, 100ml 한 병에 무려 400송이의 터키산 장미가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장미는 예쁘장한 분홍색 장미가 아니라, 흙내음과 향 냄새가 뒤섞인 어둡고 관능적인 붉은 장미다.

헨리 제임스의 동명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클래식한 우아함과 현대적인 강렬함이 공존한다.



2. 노트 구성

탑 노트 (Top Notes): 장미, 클로브(정향), 라즈베리, 블랙커런트, 시나몬

강렬한 장미 향이 톡 쏘는 향신료(클로브, 시나몬)와 섞여 폭발하듯 시작된다. 베리류의 산미가 살짝 스치지만 달콤하기보다는 날카롭다.

미들 노트 (Middle Notes): 패출리, 인센스(향), 샌달우드

장미 향을 뚫고 축축한 흙내음(패출리)과 스모키한 향 냄새(인센스)가 올라오며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지고 웅장해진다.

베이스 노트 (Base Notes): 머스크, 앰버, 벤조인

깊고 진한 나무 향과 앰버의 따뜻함이 남지만, 끝까지 장미와 패출리의 뉘앙스가 길게 이어진다.



3. 전체적인 리뷰

"장미 향수는 뻔하다"는 편견을 산산조각 내는 향수다.

꽃향기라기보다는 거대한 서사시에 가깝다.

초반의 스파이시한 장미는 공격적일 만큼 강렬하고, 이어지는 패출리와 인센스는 엄숙하고 고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속력과 확산력이 괴물급이라 한 번만 뿌려도 하루 종일, 아니 다음 날까지도 존재감을 과시한다.

캐주얼한 복장에는 도저히 매치하기 힘든, 격식과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향수다.



### 400송이 장미의 장례식, 혹은 고딕 여왕의 행차


세상에는 만나기 전부터 기에 눌리는 압도적인 인물이 있다.

오늘 독대한 프레데릭 말의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Portrait of a Lady)’는 바로 그런,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채찍을 든 여왕님이다.

이름은 ‘여인의 초상’이라며 고전 소설 속 우아한 귀부인을 표방하지만, 그 실체는 왕좌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절대군주에 가깝다.

과연 이 무시무시한 여왕님을 모시고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비장한 마음으로 알현을 청했다.


그녀의 등장은 단순한 입장이 아니라 ‘공습’이다.

400송이의 붉은 장미를 농축해서 얼굴에 쏟아붓는 듯한 충격.

하지만 그 장미들은 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꽃이 아니다.

클로브(정향)와 시나몬이라는 날카로운 가시를 잔뜩 품고, 붉다 못해 검게 말라버린, 피 냄새 섞인 장미다.

“고개를 들라”는 말 대신, 강렬한 향신료의 따귀를 때리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시작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정신을 수습할 틈도 없이 그녀는 거대한 지하 신전으로 끌고 간다.

이 향수의 진짜 지배자인 패출리(Patchouli)의 등장이시다.

축축하고 서늘한 흙냄새가 진동하고, 그 위로 매캐한 인센스(향)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것은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장엄한 장례식, 혹은 고대의 주술 의식 현장이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숭배를 강요한다.

그녀의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무거운 벨벳의 질감과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냉기. ‘레이디’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마녀 혹은 여사제의 서늘한 카리스마가 온몸을 휘감는다.


이 여왕님과의 동행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동반한다.

그녀의 목소리(발향력)는 어찌나 우렁찬지, 옆방에 있는 사람조차 그녀의 방문을 알 정도다.

트레이닝복이나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그녀를 만나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한다.

그녀는 착용자에게도 완벽한 핏의 정장과 구두,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요구한다.

그녀를 입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지배하는 주객전도의 상황.

하루 종일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다.


최종 알현 보고.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는 향수가 아니라 ‘권력’이다.

그것도 아주 절대적이고 파괴적인 권력이다.

그녀는 장미 향수의 탈을 쓴, 가장 우아하고 잔혹한 빌런이다.

감각만으로 그녀를 느끼면,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코앞에서 듣는 듯한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분명 걸작임에는 틀림없으나, 매일 만나고 싶은 친구는 결코 아니다.

그녀는 일 년에 한두 번, 내가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할 때, 혹은 누군가를 기어이 이겨먹어야 할 때, 나를 대신해 싸워줄 용병으로 고용하고 싶은 존재다.

물론, 그 용병비(가격)와 뒤처리(잔향)는 혹독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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