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향수 설명
‘떼르 데르메스(Terre d'Hermès)’는 2006년 출시된 이후 남성 향수의 교과서로 자리 잡은 에르메스의 걸작이다.
이름 그대로 ‘에르메스의 대지(Earth)’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천재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Jean-Claude Ellena)가 조향 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수직적인 구조를 표현했다고 하며, 달콤함이나 가벼움을 배제한, 건조하고 우직한 남성미를 보여준다.
2. 노트 구성
탑 노트 (Top Notes): 오렌지, 자몽
흔한 과일 주스의 달콤함이 아니다. 껍질을 손으로 꽉 쥐어짜 냈을 때 튀어 오르는 쌉쌀하고 시큼한(Bitter & Zesty) 향이다.
미들 노트 (Middle Notes): 페퍼(후추), 펠라고늄(제라늄), 플린트(부싯돌)
이 향수의 핵심인 ‘광물(Mineral)’의 느낌이 난다. 비에 젖은 돌이나 부싯돌을 쳤을 때 나는 매캐하고 서늘한 쇠 냄새가 스파이시한 후추와 섞인다.
베이스 노트 (Base Notes): 베티버, 시더우드, 패출리, 벤조인
나무뿌리와 흙냄새가 진하게 깔린다. 아주 건조하고 단단한 나무의 느낌으로, 중후하고 안정적인 마무리를 짓는다.
3. 전체적인 리뷰
"성공한 중년 남성의 향기"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
가벼운 유행을 쫓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이 확고한 전문가의 느낌이다.
흙, 나무, 돌의 향이 주를 이루어 매우 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세련된 슈트를 차려입은 듯한 도시적인 느낌이 공존한다.
20대보다는 30대 중반 이후, 캐주얼보다는 정장에 잘 어울리는 무게감 있는 향수다.
흙 묻은 슈트를 입은 신사, 떼르 데르메스와의 악수
세상에는 '어른인 척'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존재 자체가 '진짜 어른'인 사람들이 있다.
오늘 만난 친구, 에르메스의 ‘떼르 데르메스’는 후자다.
그는 얄팍한 유행어나 가벼운 농담 따위는 모른다.
헐렁한 후드티나 찢어진 청바지도 입지 않는다.
그는 최고급 원단으로 지은 슈트를 입고, 구두에는 약간의 진흙을 묻힌 채 나타난, 중년의 건축가 혹은 지질학자 같다.
과연 이 근엄한 신사와 편안한 대화가 가능할지, 긴장된 마음으로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아귀 힘은 셌다.
첫인사는 달콤한 미소가 아니라, 쌉쌀한 자몽과 오렌지 껍질의 향기다.
이것은 마트에서 파는 오렌지 주스가 아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바싹 말라가는 과일 껍질의 건조하고 씁쓸한 냄새다.
"인생은 달콤하지 않다네, 젊은 친구."라고 훈계하는 듯한, 단호하고 현실적인 첫인상.
빈말이라도 "오늘 참 멋지시네요" 같은 입에 발린 소리는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자리에 앉자,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인 '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의 몸에서는 부싯돌(Flint) 냄새가 난다.
비가 내리기 직전의 습한 공기 냄새 같기도 하고, 뜨겁게 달궈진 돌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냄새 같기도 하다.
여기에 톡 쏘는 후추 향이 더해져, 그가 단순히 책상에만 앉아있는 샌님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는 현장에서 직접 흙을 만지고 돌을 깨는 사람이다.
땀과 먼지, 그리고 광물질이 뒤섞인 이 기묘한 향기는 그를 섹시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딱딱하고, 지루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깊이가 있다.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티버(Vetiver)의 흙냄새와 시더우드의 건조한 나무 향이 공간을 꽉 채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나무와 같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
어떤 고민을 털어놓아도 "다 괜찮아질 거야" 같은 위로 대신, "버텨라.
뿌리를 깊게 내려라." 같은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것만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숨이 막힌다.
그의 완벽한 자기 관리와 흐트러짐 없는 태도는 존경스럽지만, 그 앞에서는 다리를 꼬거나 하품을 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을 것 같다.
최종 결론.
떼르 데르메스는 향수가 아니라 '신분증'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가 자신의 지위를 증명하기 위해 꺼내 드는 명함과 같다.
그는 멋지다.
중후하고, 우아하며, 남성적이다.
하지만 그와 친구가 되어 매일 저녁 맥주를 마시고 싶지는 않다.
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러 갈 때나, 혹은 내가 이 구역의 '진짜 어른'임을 보여줘야 할 때만 찾게 될, 어렵고도 든든한 형님이다.
그의 향기를 맡으면, 거칠고 단단한 대지의 질감이 손끝에 만져지는 듯하다.
그는 땅을 딛고 선 자의 묵직함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가끔은 땅 따위 잊어버리고 하늘로 둥둥 떠다니고 싶을 때도 있는 법.
떼르 데르메스는 그런 일탈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아버지의 냄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