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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누구의 것인가

학술 정보의 역설과 '오픈 액세스(Open Access)' 운동

by 김경훈


현대 사회에서 대학과 연구소는 지식을 생산하는 핵심 엔진입니다. 이 지식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공유'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거대한 역설이 발생합니다.


대부분의 연구(특히 이공계)는 공공의 세금으로 수행됩니다. 연구자는 그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하여 학술지에 '무료로' 기고합니다. 동료 연구자들 역시 '무료로' 동료 심사(Peer review)를 하여 그 논문의 질을 보증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논문을 읽어야 할 다른 연구자, 학생, 그리고 대중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엘스비어(Elsevier), 스프링거 네이처(Springer Nature), 와일리(Wiley) 등 거대 상업 출판사들이 구축한 높은 '구독료 장벽(Paywall)'에 부딪힙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생산하고, 학자들의 자발적 노동으로 검증한 '공공재'적 지식이 왜 사기업의 '독점적 상품'이 되어 천문학적인 구독료를 지불해야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1. '빅딜'의 배신과 '학술지 구독 위기'


이 문제는 1990년대 후반, 출판사들이 도서관에 '빅딜(Big Deal)'이라 불리는 구독 모델을 제시하며 심화되었습니다. 수천 종의 저널을 '묶음'으로만 판매하는 방식입니다.


도서관은 개별 저널을 선택할 권리를 울며 겨자 먹기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 구독료는 매년 물가 상승률을 훨씬 웃돌며 폭등했고, 대학 도서관 예산의 70~80%를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학술지 구독 위기(Serials Crisis)'라 불리며, 도서관이 정작 필요한 다른 책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여력을 앗아갔습니다.


MIT, 하버드, UC 버클리 등 세계 최고 대학들조차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며 공개적으로 구독 중단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2. 문헌정보학의 반격: '오픈 액세스(OA)' 운동


이 불합리한 구조를 깨기 위한 문헌정보학계와 학술 커뮤니티의 실천적 저항이 바로 '오픈 액세스(Open Access, OA)' 운동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학술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념입니다.


OA를 실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골드 OA (Gold OA):

저자(혹은 저자의 소속 기관)가 출판사에 '논문 처리 비용(APC, Article Processing Charge)'을 지불하고, 논문이 출판되는 즉시 모든 사람이 무료로 읽을 수 있게 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는 구독료의 부담을 '연구비'로 전가시킨다는 또 다른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2) 그린 OA (Green OA):

저자가 자신의 논문(심사 완료본 또는 최종본)을 소속 기관이나 공공 아카이브에 '직접' 업로드(Self-Archiving)하여 공개하는 방식입니다.



3. 도서관의 역할 변화: '구매자'에서 '생산자'로


이 '오픈 액세스' 운동의 최전선에 바로 문헌정보학 전문가 즉 사서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장소 관리자 (Repository Manager):

'그린 OA'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인프라인 '기관 리포지터리(Institutional Repository, IR)'를 구축하고 운영합니다. 이곳에 소속 연구자들의 논문, 학위 논문, 데이터를 수집하고 보존하여 외부에 공개합니다.

출판의 조력자 (Publisher/Advocate):

도서관이 직접 학내 OA 학술지 발간을 지원하거나, 연구자들에게 OA 출판 방법과 저작권 정책을 컨설팅하는 '학술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활동합니다.

협상가 (Negotiator):

거대 출판사를 상대로 '빅딜' 구독 계약이 아닌, 구독료와 OA 출판 비용(APC)을 통합하여 협상하는 '전환 계약(Transformative Agreement)'을 주도합니다.


'학술지 구독 위기'와 '오픈 액세스'는 문헌정보학이 단순히 정보를 정리하는 학문이 아니라, '지식의 생산-유통-보존'이라는 거대 생태계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실천적 학문'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사례입니다.


이는 '정보는 공평하게 접근 가능해야 한다'는 문헌정보학의 가장 오래된 윤리적 가치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과 어떻게 충돌하고 또 맞서 싸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재진행형 이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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