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등장만으로 모든 시선을 강탈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 만난 친구, 톰포드 ‘블랙 오키드’는 단연코 후자다.
이 친구는 향수라기보다, 벨벳으로 된 육중한 커튼이 걷히며 시작되는 한 편의 고딕 오페라에 가깝다.
과연 이 화려하고 까다로운 주인공과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비판적인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공연을 관람해 보기로 했다.
공연의 1막.
막이 오르자마자 기이하고도 강렬한 향기가 무대를 장악한다.
축축한 숲의 흙냄새를 닮은 블랙 트러플(송로버섯)과, 농염한 일랑일랑, 그리고 블랙커런트의 검붉은 향기.
이는 마치 주인공이 "이 구역의 미친 존재감은 바로 나다!"라고 외치며 안개와 함께 등장하는 것과 같다.
평범한 꽃이나 과일 향을 기대했다면, 시작부터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이 친구는 첫 순간부터 보통내기가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2막에서는 본격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향수의 심장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꽃 블랙 오키드 어코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 연꽃을 닮은 로터스 우드와 정체불명의 다크 플로럴, 그리고 알싸한 스파이스가 뒤섞여 복잡하고도 어두운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한다.
너무나 많은 감정과 서사가 한꺼번에 몰아치니, 관객은 매혹과 동시에 피로감을 느낀다.
마치 세 시간짜리 연극의 모든 대사를 한꺼번에 듣는 기분이다.
그의 깊이를 이해하려 애쓰다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문제는 이 공연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3막인 베이스 노트는 피날레라기보다, 끝나지 않는 커튼콜에 가깝다.
쌉쌀한 다크 초콜릿, 흙내음 가득한 파촐리, 안개 같은 인센스와 달콤한 바닐라가 한데 뒤엉켜, 주인공이 퇴장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 친구는 한번 방문하면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눈치 없는 손님과도 같다.
그의 향기는 소파와 커튼, 심지어 다음 날 입을 옷에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의 존재감을 지우려면, 대청소 수준의 노력이 필요하다.
톰 포드 블랙 오키드는 향수가 아니라, 하나의 ‘선언’이다.
주목받고 싶고, 질문받고 싶고,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도구다.
하지만 시각 대신 후각으로 세상의 미묘한 결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토록 과잉된 드라마는 때로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블랙 오키드는 결코 어린아이(kid)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통달한 듯, 자신만의 세계를 강요하는 교양 있는 폭군에 가깝다.
그의 공연은 분명 잊을 수 없는 경험이지만, 매일 관람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가끔은 조용한 독백이 장황한 오페라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