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흉물, 에펠탑의 생존 투쟁 보고서

심미적 혐오와 군사적 효용성의 아이러니한 상관관계

by 김경훈


1. 서론: 패배의 그림자와 제국의 자존심


1871년의 파리는 잿빛이었다. 단순히 날씨의 탓이 아니었다. 거리를 걷는 파리지앵들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세련되기로 소문난 그들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지 않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참패, 그리고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콧대 높던 프랑스의 자존심은 독일군의 군홧발 아래 처참히 짓밟혔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즉위식을 올리던 그 치욕적인 순간, 프랑스의 영광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정부 관료들이 모인 회의실의 공기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탁자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한 고위 관료의 탄식 섞인 목소리였다.


"이제 우리 프랑스도 좀 살 만해 지지 않았습니까? 독일 놈들이 집적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의 말에 맞은편에 앉은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가를 비벼 껐다.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은 그간의 고뇌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렇지. 파리코뮌인지 뭔지, 그 잡스러운 놈들도 다 쓸어버렸으니 내부는 좀 조용해졌지. 하지만... 뭔가 부족해. 밖에서 볼 때 우리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줄 '한 방'이 필요해."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 독일에게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다는 열망이 이글거렸다.


"건물을 짓는 게 최고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보면 독재자든 영웅이든 다들 거대한 걸 때려 짓지 않습니까. 1889년 만국박람회 때 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걸 보여주는 겁니다. 아주 크고, 웅장하고, 강력한 프랑스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렇게 '프랑스 기념 건축물 설계공모전'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막이 올랐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 공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제국의 자존심을 세우는 국가적 과업이었다.



2. 철의 마술사, 에펠의 등장과 굴욕적인 계약


공모전 소식이 알려지자 프랑스 전역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화려한 설계도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심사위원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철의 마술사'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의 제안서였다.


에펠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잘 정돈된 수염과 확신에 찬 눈빛, 그리고 거침없는 손짓은 그가 왜 '거장'이라 불리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 누가 만들었는지 아시죠? 그 뼈대, 제가 세웠습니다. 가라비 고가철교? 그것도 접니다. 파나마 운하요? 말해 뭐 합니까. 저 아니면 이런 거 못 만듭니다."


그가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조감도는 충격적이었다.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이 즐비한 파리 시내 한복판,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광장에 무려 300미터짜리 거대한 철제 탑이 솟아 있었다.


"철제 탑이라고요? 파리의 미관과 어울릴까요?"


심사위원의 우려 섞인 질문에 에펠은 코웃음을 쳤다.


"이건 혁명입니다. 납작한 파리의 지평선 위에 우뚝 솟은 철의 수직선! 상상해 보십시오.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그 웅장함을! 이건 대박입니다."


결국 1887년 1월 8일, 프랑스 정부는 에펠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계약의 내용은 에펠의 자신감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예산 담당 관료는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총공사비가 650만 프랑이라고? 에펠 선생, 우리가 줄 수 있는 돈은 150만 프랑이 전부요."


에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당혹감이 번졌다.


"네? 150만 프랑이요? 그럼 나머지 500만 프랑은요? 땅 파서 장사합니까? 저더러 굶어 죽으라는 겁니까?"


관료는 무심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나머지는 알아서 충당하시오. 대신 특권을 주겠소. 완공 후 20년 동안 이 탑에서 나오는 수익을 독점할 권리. 이걸로 퉁칩시다."


에펠은 입술을 깨물었다. 막대한 빚을 지고 시작하는 공사였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자금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제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에펠의 인생을 건 도박이 되었다.



3. 파리의 수치, 혐오의 대상이 되다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파리는 들끓었다. 찬사가 아닌 비난의 용광로였다. 샹 드 마르스 인근 주민들은 공사 현장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거대한 철골이 올라가는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저게 무너지면 우리 집은 박살이 날 거야! 이건 살인 무기나 다름없어!"


주민들은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고, 공사 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현장으로 몰려온 주민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분노가 가득했다. 에펠은 그들 앞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변론해야 했다.


"나 에펠입니다! 자유의 여신상도 버티는데 이까짓 게 무너질 것 같습니까? 만약 사고가 나면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배상하겠습니다! 내 목숨을 겁니다!"


주민들의 반발이 생존 본능에서 나온 것이라면, 예술가들의 반발은 '미학적 신념'에서 나온 혐오였다. 1887년 2월 14일, <르 탕(Le Temps)>지에는 '예술가의 항의'라는 제목의 성명서가 실렸다. 샤를 구노, 알렉상드르 뒤마 2세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서명한 이 글은 에펠탑을 '파리의 수치'로 규정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항의한다! 쓸모없고 흉측한 에펠탑 건설을 반대한다! 거대한 공장 굴뚝같은 저 검은 쇳덩어리가 노트르담 대성당과 루브르 박물관의 아름다움을 짓밟으려 한다!"


그중에서도 소설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혐오는 병적이었다. 그는 에펠탑을 볼 때마다 구역질을 참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훗날 그가 에펠탑 내부의 식당에서 자주 식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물었다.


"선생님, 그토록 싫어하시던 에펠탑에서 식사를 하시다니요?"


모파상은 스테이크를 썰며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파리 시내에서 저 흉물스러운 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 바로 여기니까."


에펠은 고립무원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맞으며 그는 묵묵히 도면을 검토했다. 5,300장에 달하는 설계도면, 18,038개의 철조각, 250만 개의 리벳. 그는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현장의 인부들은 에펠의 지독한 완벽주의에 혀를 내둘렀다. 57m 높이의 1 전망대까지 올라갔을 때 발생한 오차가 겨우 리벳 구멍 하나 크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 탑에 얼마나 미친 듯이 매달렸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4. 20년의 시한부 인생과 극적인 반전


1889년 4월 15일, 마침내 에펠탑이 완공되었다. 300m 상공에 프랑스 국기가 펄럭이자, 비난하던 여론은 거짓말처럼 뒤집혔다. 박람회장을 찾은 200만 명의 관람객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인간이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니!"

"구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야!"


에펠은 쏟아지는 입장료 수입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년 만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고 흑자로 돌아섰다. 자신을 비난했던 예술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펠탑은 파리의 모든 돈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가 되었다.


그러나 기쁨은 영원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명시된 '20년'이라는 숫자가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고 있었다. 1909년이 다가오자 철거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약속은 약속이지. 이제 저 고철 덩어리를 치울 때가 됐어."

"땅을 원상 복구하시오."


에펠은 다급해졌다. 칠순이 넘은 노구의 건축가는 자신의 역작이 고철상에게 팔려나가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탑의 쓸모를 증명하려 애썼다. 탑 꼭대기에 기상 관측소를 설치하고, 공기 역학 실험을 위해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것 보시오! 여기서 기상 데이터도 얻을 수 있고, 과학 실험도 할 수 있단 말이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했듯이 말이오!"


하지만 시 당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에게 에펠탑은 여전히 '철거 비용이 많이 드는 흉물'일뿐이었다. 에펠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흐려지던 그때, 구원의 손길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프랑스 군대였다.


한 장군이 에펠탑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거참... 높긴 더럽게 높군. 잠깐, 저렇게 높으면 전파도 멀리 나가지 않겠나?"


당시는 무선 통신 기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군부는 에펠탑이 거대한 송신 안테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일군의 동태를 감청하고, 전선에 명령을 하달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위치는 없었다.


"철거 중지! 이 탑은 이제 국가 전략 자산이다."


군부의 명령 한마디에 에펠탑의 운명은 180도 바뀌었다. 예술적 가치가 아닌, '거대한 전봇대'로서의 효용성이 이 탑을 살린 것이다. 에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름진 손이 차가운 철골을 쓰다듬었다. 마치 자식의 어깨를 토닥이는 아버지처럼.



5. 결론: 데이터 뒤에 숨겨진 인간의 드라마


우리가 지금 파리의 엽서에서 보는 에펠탑은 사실 수많은 욕설과 비난, 그리고 빚더미와 소송 위에서 위태롭게 피어난 꽃이었다. 만약 에펠이 주민들의 협박에 굴복했거나, 예술가들의 조롱에 의기소침해 포기했다면, 혹은 무선 통신이라는 기술적 변곡점이 없었다면, 에펠탑은 1909년에 해체되어 숟가락이나 냄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데이터는 결과만을 기록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대를 앞서간 한 인간의 집념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대중의 공포, 그리고 뜻밖의 행운이 얽히고설킨 거대한 드라마가 존재한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무언가가 쓸모없고 흉측해 보이는가?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그것이 20년 뒤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상징이 될지, 혹은 당신의 목숨을 구할 안테나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파상이 싫어하면서도 매일 그 안에서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싫어하는 것들과 공생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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