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시트 아래서 발견된 기적

실패한 심장약, 밤의 황제가 되다

by 김경훈


1. 서론: 영국의 우울한 빗줄기와 제약회사의 한숨


1990년대 초반, 영국 샌드위치(Sandwich).

이름은 맛있어 보이지만, 이곳에 위치한 화이자(Pfizer) 연구소의 분위기는 창밖을 때리는 런던의 빗줄기만큼이나 축축하고 우울했다.


연구소의 공기는 소독약 냄새와 타버린 커피 냄새, 그리고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천억 원의 연구비, 수년의 시간, 수십 명의 박사급 인력. 이 모든 자원을 쏟아부은 야심 찬 프로젝트가 지금 막, 거대한 실패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려던 것은 '협심증 치료제'였다.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확장해 피를 잘 돌게 만드는 약. 프로젝트명 'UK-92,480'.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현실의 데이터는 냉혹했다.


"혈관 확장이 되긴 하는데... 심장이 아닙니다."


연구 책임자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약을 먹은 환자들의 심장 혈관은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엉뚱한 부작용만 속출했다. 근육통, 소화불량, 그리고 등 통증.


"끝났군. 실패야. 프로젝트 접어."


그것은 사형선고였다. 이제 남은 건 임상시험에 참여한 환자들에게 남은 약을 회수하고, 보고서에 '실패' 도장을 찍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데이터의 신은 짓궂은 장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2. 이상한 환자들: "이 약, 절대 못 돌려줍니다!"


임상시험 종료일. 간호사들과 연구원들은 환자들에게 지급했던 남은 알약을 회수하러 다녔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평소라면 부작용만 가득한 실패한 약을 줘서 고맙다고 던져줬을 환자들이 이상하게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웨일스 스완지(Swansea)의 한 병원. 중년의 남성 환자 하나가 간호사의 눈을 피하며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저기... 약이 좀 남았는데, 그냥 제가 가지면 안 될까요?"

"네? 무슨 소리세요? 효과도 없고 근육만 쑤신다면서요. 규정상 다 회수해야 합니다. 주세요."

"아니, 그게... 남은 건 기념으로 좀..."


환자는 필사적이었다. 심지어 어떤 환자들은 약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화장실 변기에 숨겨두기까지 했다. 연구원들은 당황했다.

'도대체 왜? 소화도 안 되고 등만 쑤시는 이 파란색 알약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지?'


연구원들은 환자들을 한 명씩 독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숨기는 게 있죠? 뭡니까? 또 다른 부작용입니까?"


침묵이 흘렀다. 환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인류의 밤 문화를 바꿀 결정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게요... 심장은 여전히 아픈데... 아랫도리가... 힘이 넘칩니다."

"네?"

"아침마다... 아니, 밤새도록... 마치 스무 살 때처럼 텐트가 쳐집니다."



3. 데이터의 재해석: 부작용이 아니라 '주작용'이다


연구소는 발칵 뒤집혔다.

심장 혈관을 넓혀야 할 약물이 엉뚱하게도 남성의 음경 해면체 혈관을 강력하게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으로 가야 할 피가 모조리 '그곳'으로 쏠리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한 부작용(Side Effect)이었다. 원래 의도와 다른 작용이 일어났으니까.

하지만 화이자의 경영진과 연구원들은 이 데이터를 두고 치열한 고민에 빠졌다.


"이건 실패한 심장약입니다. 폐기해야 합니다."

"잠깐만, 생각을 바꿔봐. 심장약으로는 실패했지만... 만약 이걸 '발기부전 치료제'로 내놓으면?"


당시까지만 해도 발기부전은 치료 불가능한 노화의 과정이거나, 수치스러운 비밀이었다. 기껏해야 해구신을 달여 먹거나, 끔찍하게 아픈 주사를 그곳에 직접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먹기만 하면 되는 알약이라니?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빗소리는 더 이상 우울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황금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였다.

"부작용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 약의 '주작용'이다! 타겟을 바꾼다. 심장이 아니라, 그 아래 30cm!"



4. 푸른 다이아몬드의 탄생: 침실의 혁명


1998년, 미국 FDA는 이 약의 판매를 승인했다. 상품명 '비아그라(Viagra)'. 활력(Vigor)과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의 합성어였다. 정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는 다분히 노골적인 이름이었다.


세상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출시 첫 주에만 25만 건의 처방전이 쏟아졌다. 약국 앞에는 백발의 노인들이 밤새 줄을 섰다. 뉴스에서는 연일 '해피 드러그(Happy Drug)'의 탄생을 보도했다.


"여보, 나 다녀올게!"

은퇴 후 무기력하게 지내던 남성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부부싸움이 줄어들고, 침실에는 웃음꽃이 피었다(물론 너무 무리하다가 복상사하는 사고가 뉴스에 나오기도 했지만).


화이자의 주가는 로켓처럼 치솟았다. 실패해서 쓰레기통에 들어갈 뻔했던 화합물 'UK-92,480'은 연간 매출 2조 원을 벌어들이는 '푸른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5. 단순한 약이 아니다: 문화를 바꾼 데이터


비아그라의 성공은 단순히 돈방석에 앉은 제약회사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 약은 인류의 '문화'를 바꿨다.


그전까지 '발기부전(Impotence)'은 남성성의 상실, 수치, 죄악으로 여겨졌다. 환자들은 병원에 가는 대신 숨어서 뱀술을 마셨다. 하지만 비아그라가 나오면서 이것은 '발기기능장애(Erectile Dysfunction, ED)'라는 의학적 질병으로 재정의되었다.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약을 먹으면 고칠 수 있는 '질환'이 된 것이다.


음지에서 떨던 남성들을 양지의 병원으로 끌어낸 것. 이것이야말로 비아그라가 만든 진정한 혁명이었다.



6. 결론: 실패는 성공의 다른 이름


만약 그때, 영국의 연구원들이 환자들의 주머니를 털지 않았다면? 환자들이 쪽팔림을 무릅쓰고 "거기가 섭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비아그라는 그저 '효과 없는 심장약'으로 분류되어 실험실의 먼지 쌓인 서류철 속에 영원히 잠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데이터가 보여주는 의외의 결과들을 '오류'나 '실패'라고 치부하며 무시한다. 하지만 비아그라의 사례는 말해준다.

"당신이 찾던 답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오답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뼈아픈 실패나, 의도치 않은 엉뚱한 결과 속에 인생을 뒤바꿀 '푸른 다이아몬드'가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실패했다고 너무 좌절하지 마시라. 심장은 여전히 아플지라도, 인생의 다른 무언가가 힘차게 일어서고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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