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크리넥스가 아니다? 아니요, 원래는 붕대였습니다
2006년 프랑스,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에게 소리쳤다.
"우리는 크리넥스(Kleenex)가 아니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취급하지 마라!"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며 외친 이 구호, 꽤나 인상적이다. 전 세계 일회용 휴지의 대명사가 된 크리넥스. 그런데 말이다. 이 부드럽고 하얀 티슈의 조상이 사실은 '군대'에서 태어났다면 믿으시겠는가?
그것도 피와 살점이 튀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던 '붕대'가 그 정체라면?
콧물 닦는 휴지에 무슨 피비린내가 나냐고? 에이 원래 역사는 까보면 다 그런 거다. 오늘은 얌전한 휴지 한 장에 숨겨진 살벌한 전쟁 이야기를 털어보자.
1. 전쟁이 터졌다, 붕대가 없다!
1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가 맞짱을 뜬 이 거대한 싸움판에서 가장 바쁜 곳은 어디였을까? 참호? 사령부? 아니다. 바로 야전병원이었다.
"아악! 군의관님! 팔이... 내 팔이!"
"살려주세요! 피가 안 멈춰요!"
병사들은 갈려 나가는데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붕대가 문제였다. 1917년, 뒤늦게 참전한 미군은 그야말로 '맨몸'으로 뛰어들었다. 총도 없어서 영국군한테 빌려 쓰는 판국에 붕대가 있을 리가 있나.
"야, 붕대 내놔! 애들 피 흘려 죽는다잖아!"
"없는데요?"
"세계 최대 공업국이라는 나라가 붕대 하나 없어? 면(cotton) 가져다가 짜면 될 거 아냐!"
"면도 없는데요. 다 군복 만드느라 써버려서..."
미 국방부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붕대 만들 면화가 없어서 병사들이 과다출혈로 죽어나가는 상황.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구세주가 있었으니, 바로 킴벌리 클라크(Kimberly-Clark) 사였다.
2. 짝퉁 면화의 탄생: "면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킴벌리 클라크 사는 펄프 회사였다. 이들은 전쟁이라는 특수를 놓칠세라 머리를 굴렸다.
"면이 없으면 면 비슷한 걸 만들면 되잖아. 나무 펄프를 잘게 쪼개서 솜처럼 만들면 어때?"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셀루코튼(Cellucotton)'. 목재 펄프로 만든 인조 솜이었다.
"자, 보십시오. 이게 바로 셀루코튼입니다. 천연 솜보다 흡수력이 5배나 좋습니다. 게다가 나무로 만드니까 원료 걱정 없죠, 싸죠, 막 쓰고 버려도 되죠. 빨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군용으로 딱 아닙니까?"
"오케이! 당장 납품해!"
미군은 셀루코튼을 전선으로 마구 실어 날랐다. 야전병원에서는 난리가 났다.
"야, 이거 물건인데? 피를 쫙쫙 빨아들여!"
"빨래 안 하고 그냥 버려도 되니까 너무 편하다."
셀루코튼은 붕대 대용으로 대박을 쳤다. 게다가 흡수력이 워낙 좋다 보니 엉뚱한 곳에도 쓰였는데, 바로 방독면 필터였다. 독일군의 독가스를 막아주는 필터로도 셀루코튼만 한 게 없었던 것이다. 킴벌리 클라크 사는 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하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사장님, 미군에서 더 달랍니다!"
"돌려! 기계가 터질 때까지 돌려! 이게 다 애국하는 길이야(돈 버는 길이야)!"
3. 간호사들의 비밀: "언니, 그날인데 어떡하지?"
그런데 전선에서 셀루코튼의 진가를 알아본 건 군의관뿐만이 아니었다. 야전병원 간호사들이었다.
전쟁터라지만 여자들의 생리 현상이 멈추는 건 아니다. 문제는 이 팔팔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생리대를 빨아서 말린다는 게 여간 민망하고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언니, 어떡해. 생리대를 빨아서 널어놨는데 안 말랐어. 축축해."
"그냥 붕대라도 써야지 뭐."
"붕대 말고 저거... 셀루코튼 어때?"
"저거?"
간호사들은 셀루코튼 뭉치를 거즈에 싸서 임시 생리대로 써봤다. 그리고 신세계를 경험했다.
"대박! 이거 진짜 편해. 흡수력 짱이야."
"무엇보다 안 빨아도 되잖아. 쓰고 그냥 버리면 끝!"
이것이 바로 현대식 일회용 생리대의 시초였다. 전쟁터의 피비린내 속에서 여성 해방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4. 전쟁 끝, 재고 폭탄: "이걸 다 어쩌라고?"
1918년, 독일이 항복했다. 전 세계가 환호성을 질렀지만, 킴벌리 클라크 사장은 울상이었다.
"아니, 독일 놈들 왜 이렇게 빨리 항복해? 좀 더 버티지!"
전쟁이 길어질 줄 알고 창고에 셀루코튼을 산더미처럼 쌓아놨는데, 전쟁이 끝나버린 것이다. 붕대도, 방독면 필터도 이제 필요 없었다. 회사는 부도 위기에 몰렸다.
"야! 머리들 좀 굴려봐! 저거 다 갖다 버릴 거야? 뭐라도 해서 팔아먹어야 할 거 아냐!"
"사장님, 간호사들이 저걸 생리대로 썼다는데요?"
"오호라? 그거 괜찮네. 당장 상품화해!"
1920년, 킴벌리 클라크는 셀루코튼으로 만든 세계 최초의 일회용 생리대 '코텍스(Kotex)'를 출시했다.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용품을 대놓고 광고하기가 민망했던 시절이라...
"야, 생리대 말고 다른 건 없어? 좀 더 대중적인 거!"
"저기... 이게 흡수력이 좋으니까 여자들 화장 지우는 용도로는 어떨까요? 클렌징 티슈처럼요."
"그래! 그거야! '콜드크림 지우개'로 팔자!"
5. 화장 지우개? 아니, 코 푸는 휴지!
킴벌리 클라크는 셀루코튼을 얇게 펴서 상자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크리넥스(Kleenex)'. 깨끗하다는 'Clean'에 얇은 천이라는 'Kleenex'를 합친 이름이었다. 타깃은 멋쟁이 여배우들이었다.
그런데 소비자들에게서 이상한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저기요, 이거 화장 지우는 데 써봤는데 별로던데... 근데 남편이 감기 걸려서 코 풀 때 줬더니 너무 좋다네요?"
"손수건은 빨아야 하는데 이건 그냥 버리면 되니까 짱 편해요. 코 푸는 휴지로 파세요!"
킴벌리 클라크는 무릎을 쳤다.
"우리가 바보였어! 화장 지우개가 아니라 '일회용 손수건'이었던 거야!"
회사는 즉시 마케팅 방향을 틀었다. "코를 푸세요! 그리고 버리세요!"
대박이 터졌다. 손수건 빨래에 지쳐있던 주부들이 열광했다. 여기에 상자에서 한 장씩 쏙쏙 뽑아 쓰는 '팝업 박스' 기술까지 개발되면서 크리넥스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에필로그: 역사의 아이러니
오늘날 우리는 책상 위에 크리넥스 한 통쯤은 놓고 산다. 감기 걸려 훌쩍일 때, 커피 쏟았을 때, 심지어 벌레 잡을 때도 쓴다.
하지만 기억하시라. 그 부드러운 티슈 한 장에는 1차 세계대전 참호 속 병사들의 비명과, 피 묻은 붕대를 대신했던 절박함, 그리고 생리대를 빨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간호사들의 애환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전쟁터의 붕대가 화장 지우개를 거쳐 코 푸는 휴지가 되기까지. 역사는 참으로 얄궂고도 실용적이다. 뭐 어쨌든, 덕분에 우리는 코 풀고 쿨하게 휴지통에 던져버릴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운 일 아니겠는가?
� 덤으로 하나 더: 기관총이 만든 사무용품 '스테이플러'
티슈만 전쟁 출신인 줄 아나? 책상 위의 단짝, 스테이플러(호치키스)도 족보를 까보면 살벌하다.
1차 대전 때 기관총으로 떼돈을 번 벤자민 스테이플러. 전쟁 끝나고 기관총 주문이 끊기자 고민에 빠졌다.
"아오, 공장은 놀고 있고... 뭐 만들 거 없나?"
그때 눈에 들어온 게 기관총 급탄 방식이었다. 탄창에서 총알이 하나씩 올라와서 탕! 탕! 박히는 원리.
"어? 이걸 총알 대신 철심으로 바꾸고, 사람 대신 종이에 박으면?"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스테이플러(호치키스)다. 기관총의 '두두두두'가 사무실의 '철컥철컥'으로 바뀐 셈이다. 사무용품치고는 조상이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