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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무료

성자의 은빛 성배

그 안에는 악마가 산다

by 김경훈


1. 10만 신도의 함성


왕국 수도의 북쪽, ‘하얀 거짓말’ 언덕 위에는 거대한 대리석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신전의 입구에는 [알-고르(Al-Gore-Izm) 교단: 구독과 좋아요는 구원입니다]라는 현판이 황금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오늘은 교단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교주 카엘이 신으로부터 ‘10만 영혼의 증표’를 하사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와아아아! 카엘! 카엘!


광장에는 10만 명의 신도가 모여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열기는 용광로 같았다. 땀 냄새와 싸구려 향유 냄새, 그리고 며칠을 노숙하며 기다린 사람들의 체취가 뒤섞여, 신전의 공기는 끈적하고 탁했다.


교주 카엘은 신전 꼭대기의 발코니에 섰다.

그는 눈부신 백색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사실 속에는 최고급 실크 속옷을 입어 살에 닿는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사실은 마법으로 턱을 깎고 피부를 보정한 것이다)에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사랑하는 ‘구독자’ 형제자매 여러분!”


카엘의 목소리가 마법 확성기를 타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드디어! 위대하신 신, 알-고르께서 저의 신앙심을 인정하셨습니다! 오늘, 하늘에서 ‘은빛 성배(Silver Grail)’가 내려올 것입니다!”


“오오! 기적이다! 후원금을 더 내자!”


신도들은 주머니를 털어 헌금함에 금화를 쏟아부었다. 짤그랑, 짤그랑. 금화 쌓이는 소리가 카엘에게는 천상의 하프 연주보다 아름답게 들렸다.


카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실버 버튼… 아니, 은빛 성배다! 이걸로 신도 수를 두 배로 불려서 옆 나라에 별장을 사야지.’


그는 사실 전직 거리의 야바위꾼이었다. 말빨 하나로 사람들을 홀려 이 거대한 교단을 세웠고, 마법 조명과 특수 효과를 ‘기적’이라고 속여왔다.



2. 천사가 된 배달부


그때,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빛줄기가 내려왔다.


쿠구구구!


사실은 고위 마법사들을 매수해서 만든 환영 마법이었다. 빛 속에서 날개 달린 존재가 천천히 내려왔다.


사람들은 “천사다! 천사야!”라며 엎드려 절을 했다.

하지만 카엘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저것은 천사로 분장한 ‘와이번 택배’ 기사였다. 기사는 피곤한 표정으로(잘 보이지 않겠지만) 품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여기, 서명하세요.”


기사가 속삭였다. 카엘은 성스러운 척 손을 흔들며, 몰래 기사의 양피지에 서명했다.


“수고했네. 팁은 헌금함에서 꺼내 가게.”


기사는 상자를 카엘에게 넘기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카엘은 상자를 높이 쳐들었다.


“보라! 이것이 바로 신의 선물이다!”


상자는 투박한 갈색 종이로 포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도들의 눈에는 그 상자마저 성물처럼 보였다.


“자, 이제 성스러운 ‘언박싱(Unboxing)’ 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카엘은 단상 중앙에 놓인 황금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침묵이 광장을 지배했다. 10만 명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직 바람 소리와 카엘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쿵, 쿵 울렸다.



3. 찢어지는 봉인


카엘은 의식용 단검(사실은 택배용 커터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이 상자를 여는 순간, 우리 교단은 새로운 차원으로 승격될 것입니다!”


찌이익.


종이테이프가 찢어지는 소리가 마법 확성기를 통해 거칠게 증폭되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마저 경전의 한 구절처럼 경청했다.


카엘은 포장지를 벗겨냈다.

안에는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재생 버튼(Play Button)’ 문양이 박혀 있었다.


‘영롱하구나. 순은인가? 아니면 도금인가? 나중에 전당포에 알아봐야지.’


카엘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의 뚜껑을 잡았다.


“개봉합니다! 3… 2… 1…!”


달칵.


뚜껑이 열렸다.

그 순간, 상자 안에서 눈부신 은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신도들은 눈이 부셔 비명을 질렀다.


“아아! 성스러운 빛이다!”


하지만 카엘은 당황했다.

‘어? 내가 조명 마법은 준비 안 했는데? 왜 빛이 나지?’


그리고 빛 속에서 무언가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향긋한 향 냄새가 아니라, 시궁창 썩은 냄새와 유황 냄새가 섞인 매캐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위잉… 윙윙…


마치 수천 마리의 파리 떼가 날아다니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4. 팩트 폭력의 요정들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성배가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기괴하게 생긴 요정들이었다.


녀석들은 피부가 쭈글쭈글하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며, 입에는 독이 묻은 바늘 같은 이빨이 돋아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아주 작은 키보드(타자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진실의 요정’, 일명 ‘악플러(Malicious Commenter)’들이었다.


“키키킥! 여기가 그 사기꾼의 소굴이냐?”

“와, 냄새 봐라. 돈 썩은 냄새 진동하네.”


요정들은 카엘의 얼굴 주위를 맴돌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확성기를 타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모든 사람의 뇌리에 박히듯 선명하게 들렸다.


“어… 어? 이것들은 뭐지? 신의 사자인가?”


카엘이 뒷걸음질 쳤다.


요정 하나가 카엘의 코앞으로 날아와 소리쳤다.


“사자는 무슨! 우리는 네놈의 ‘알고리즘’이 낳은 업보들이다! 야, 얘들아! 팩트 체크 들어간다!”


요정들은 타자기를 타닥타닥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공에 붉은 글씨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폭로 1: 카엘 교주, 사실은 대머리?]

[증거 영상 재생 중…]


허공에 영상이 떴다. 카엘이 대기실에서 가발을 벗고 두피 마사지를 하는 모습이었다. 반질반질한 머리가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으아악! 꺼, 꺼꺼! 꺼져!”


카엘은 로브로 머리를 감쌌다. 신도들이 웅성거렸다.


“교주님이… 대머리셨어?”

“풍성한 머리칼은 신의 축복이라더니!”


요정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폭로 2: 기적의 성수, 사실은 수돗물?]

[성분 분석표: 수도관 녹물 0.5% 함유.]


[폭로 3: 고아원 후원금으로 드래곤 목장 구입?]

[등기부 등본 공개: 명의자 - 카엘 (본명: 춘삼)]


“이 사기꾼 놈아! 내 돈 내놔!”

“고아들을 위해 쓴다며!”


요정들은 카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어젯밤에 몰래 삼겹살 먹었지? 비건이라며?”

“너, 신도들 몰래 옆 나라 공주 인스타그램에 ‘좋아요’ 누르고 다니더라?”


그것은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 아팠다. 카엘의 위선이 그가 쌓아 올린 10년의 거짓말이 실시간으로 발가벗겨지고 있었다.



5. 쉴드 기사단의 패배


“이 이건 악마의 시험이다! 모두 귀를 막으시오!”


카엘이 악을 썼다.


“신성 기사단! 뭐 하는 거야! 저 악마들을 쳐라!”


신전의 호위병들, 일명 ‘쉴드(Shield) 기사단’(맹목적 지지자들)이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감히 우리 교주님을 모욕해? 죽어라!”


기사들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요정들은 재빠르게 날아다니며 칼날을 피했다. 요정들은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보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요정들은 기사들에게 달라붙어 그들의 흑역사도 폭로하기 시작했다.


“야! 너, 저번 달에 헌금함에서 돈 훔쳐서 도박했지?”

“너, 사실 교주님 안 믿지? 그냥 월급 많이 줘서 다니는 거잖아?”


기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뭐야? 네가 헌금 훔쳤어?”

“넌 교주님 욕하고 다녔냐?”


쉴드 기사단은 내분으로 무너졌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6. 무너지는 상아탑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도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들의 맹목적인 사랑은 순식간에 증오로 바뀌었다.


“죽여라! 사기꾼을 죽여라!”

“내 돈 돌려줘!”


사람들이 단상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퍽! 퍽!


카엘은 이마에 돌을 맞고 피를 흘렸다.


“아니야! 오해야! 해명 방송 할게! 슈퍼챗… 아니, 헌금 쏘면 해명할게!”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요정들은 카엘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비웃었다.


“꼴좋다! 나락이다, 나락!”

“구독 취소! 좋아요 취소! 신고 버튼 연타!”


신전의 거대한 카엘 동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동상의 다리를 밧줄로 묶어 당기고 있었다.


쿠우웅- 쾅!


거대한 동상이 무너져 내렸다. 카엘의 화려했던 왕국은 은빛 상자를 연 지 불과 1시간 만에 폐허가 되었다.



7. 하수구의 도망자


그날 밤.

카엘은 하수구로 도망쳤다. 화려한 로브는 찢어졌고, 가발은 벗겨져 휑한 머리가 드러났다. 그는 쥐들과 함께 오물을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였다.


“흐흑… 내 돈… 내 명예… 다 끝났어.”


그는 은빛 상자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었다. 이게 얼마짜린데.


“젠장, 이게 축복의 성배가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였어.”


카엘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요정들은 다 날아가고 상자는 텅 비어 있었다. 오직 바닥에 작은 쪽지 하나가 남아 있었다.


[축하합니다. 실버 버튼 수령을 완료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자극적인 콘텐츠 부탁드립니다. - 알 고르 신 -]


“빌어먹을 신 같으니라고…”


카엘은 쪽지를 찢어버렸다.


이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얼굴이 다 팔려서 어디 가서 사기도 못 친다. 왕국 수배 전단지에는 그의 대머리 사진(요정들이 유출한)이 대문짝만 하게 박혀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검은색 로브를 입은 눈이 없는 사내였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딱, 딱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누, 누구냐! 나 돈 없어!”


카엘이 소리쳤다.


사내는 씩 웃었다. 누런 이빨이 보였다.


“돈은 필요 없네. 자네의 그 ‘재능’이 탐나서 왔지.”


“재능? 나 사기꾼인 거 다 들통났는데 무슨 재능?”


“바로 그게 재능일세. ‘어그로(Aggro)’를 끄는 재능. 10만 명을 모으는 게 쉬운 줄 아나? 사랑받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전 국민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사내는 카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다크 웹(Dark Web)’ 길드로. 우리는 자네 같은 ‘노이즈 마케팅’의 천재가 필요해.”



8. 빌런 인플루언서의 탄생


1년 후.


왕국에는 새로운 수정구 방송 채널이 생겼다.

채널 이름은 [모두 까기 인형: 카엘의 팩트 폭격].


화면 속의 카엘은 더 이상 성자 코스프레를 하지 않았다. 그는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하고, 가발 대신 대머리에 문신을 새긴 채,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자! 안녕하십니까, 개돼지… 아니, 구독자 여러분! 지옥에서 돌아온 카엘입니다!”


그는 이제 ‘착한 척’을 하지 않았다. 대놓고 욕을 하고, 남을 헐뜯고, 세상의 모든 불행을 조롱했다.


“오늘은 옆 나라 왕비가 바람난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궁금하시죠? 궁금하면 헌금 쏴! 안 쏘면 안 보여줘!”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도 그의 방송을 봤다.

“저 쓰레기, 또 무슨 헛소리 하나 보자.”

“진짜 망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계속 봄)”


그의 신도(안티팬) 수는 예전보다 더 늘어 50만 명이 되었다.

예전에는 10만 명이 그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50만 명이 그를 증오했다.


하지만 카엘은 상관없었다.

증오도 관심이다. 그리고 증오의 에너지는 사랑보다 더 끈질기고, 더 돈이 되었다.


카엘은 방송이 끝나고 정산을 확인했다.


[오늘의 후원금: 금화 10,000닢 (욕설 메시지 포함)]


카엘은 금화를 세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욕해라! 더 욕해! 너희가 욕할수록 내 지갑은 두꺼워지니까!”


그의 뒤에는 1년 전 그를 파멸시켰던 ‘악플 요정’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제 요정들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카엘이 주는 ‘관심의 먹이’를 받아먹으며, 그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 있었다.


요정 하나가 물었다.


“주인님, 다음 타깃은 누구입니까?”


카엘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누구긴. 나를 배신했던 그 신도 놈들이지. 자, 신상 털러 가자!”


왕국은 이제 성자가 아닌, ‘최악의 빌런 인플루언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은빛 성배는 가짜였지만, 그가 만들어낸 지옥은 진짜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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