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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it Press

[1등급 매칭] 환불 불가!

용(龍) 마누라와 기생충 남편

by 김경훈


1. 향수 냄새에 가려진 곰팡이


왕국 수도의 가장 번화한 거리, ‘황금 장미’ 대로변에는 눈부시게 하얀 대리석 건물이 하나 있었다.

건물 입구에는 황금으로 된 큐피드 상이 활을 겨누고 있었고, 그 밑에는 우아한 필기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왕립 결혼 중개소 ‘헤라(Hera)’ - 당신의 품격에 맞는 짝을 찾아드립니다.]


이곳은 왕국의 귀족, 거상, 그리고 성공한 모험가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VVIP 전용 결혼정보회사였다.


몰락한 백작가의 차남이자, 허우대만 멀쩡한 사기꾼 줄리앙은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최고급 장미 향수 냄새였지만, 줄리앙의 예민한 코는 그 밑에 깔린 미세한 악취를 맡았다. 오래된 양피지의 묵은내,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발효되면서 풍기는 끈적한 땀 냄새였다.


“어서 오십시오, 줄리앙 백작님.”


상담 실장인 마담 루즈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그녀의 화장은 너무 두꺼워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가루가 떨어질 것 같았다.


“오늘도 멋지시군요. 그래,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시다고요?”


줄리앙은 푹신한 벨벳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소파의 감촉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축축했다.


“마담, 내 시간은 금이오. 빙빙 돌리지 맙시다. 나는 ‘돈’이오.”


줄리앙은 딱 잘라 말했다.


“가문? 필요 없어. 외모? 오크만 아니면 돼. 나이? 오늘내일해도 상관없소. 오직 ‘지참금(Dowry)’이 내 빚… 아니, 내 사업 자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여자면 되오.”


줄리앙은 사실 파산 직전이었다. 도박 빚으로 가문의 영지까지 날려 먹고, 남은 건 잘생긴 얼굴과 귀족 작위 하나뿐이었다. 그는 이 결혼 한 방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고 있었다.


마담 루즈는 붉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깃펜으로 양피지를 사각사각 긁는 소리가 상담실의 정적을 갈랐다.


“호호호. 아주 솔직해서 좋군요. 사실 요즘 트렌드가 그렇답니다. 낭만? 사랑? 그런 건 음유시인들이나 하는 소리죠. 결혼은 비즈니스니까요.”


마담은 두꺼운 서류철을 꺼냈다.


“백작님의 외모(S급)와 작위(A급)라면, 충분히 최상위 등급의 여성분을 소개받으실 수 있습니다. 마침… 아주 딱 맞는 분이 계시거든요.”


“어떤 분이오?”


“이그니시아 공작부인. 동방에서 오신 대부호입니다. 재산은 측정 불가. 광산을 몇 개나 가지고 계신지 본인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광산?”


줄리앙의 귀가 번쩍 뜨였다.


“다만… 조건이 좀 까다롭습니다. 그분은 ‘강인한 생명력’과 ‘절대적인 복종’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식성이 좀 특이하시죠.”


“하! 걱정 마시오. 내가 비위 하나는 왕국 제일이오. 돈만 준다면 똥이라도 먹을 수 있소.”


“좋습니다. 그럼 매칭 수수료는 ‘성혼 후불제’로 하죠. 신부님 재산의 10%를 저희에게 주시면 됩니다.”


“계약 성립.”


줄리앙은 쾌재를 불렀다. 재산의 10%를 떼어줘도 남은 90%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



2. 뜨거운 맞선


맞선 장소는 왕실 소유의 고급 레스토랑 ‘블루 문’의 프라이빗 룸이었다.

줄리앙은 빌린 턱시도를 입고, 빌린 꽃다발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복도에서부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이힐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쇠망치로 바닥을 내리찍는 듯한 진동이었다.


문이 열리고, 이그니시아 공작부인이 들어왔다.

줄리앙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거대했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고,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몸매는 풍만하다 못해 폭발할 것 같았다. 머리에는 붉은색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베일 너머로 시뻘건 안광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엄청났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방 안의 온도가 10도는 올라간 것 같았다. 식탁 위의 얼음물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반갑습니다, 공작부인. 줄리앙입니다.”


줄리앙은 땀을 흘리며 손등에 키스하려 했다. 그녀의 손은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만지자마자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장갑 아래로 딱딱하고 거친 무언가가 만져졌다. 굳은살인가?


“반갑다, 작은 인간.”


이그니시아의 목소리는 굵고 낮았다. 마치 동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향긋한 와인 냄새가 아니라, 매캐한 유황 냄새였다.


“식사하시죠.”


줄리앙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이그니시아는 메뉴판을 보더니 말했다.


“여기 있는 고기 다 가져와라. 익히지 말고. 뼈째로.”


“네?”


웨이터가 당황했지만, 이그니시아가 금화 한 주먹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자 군말 없이 따랐다.


곧이어 생고기 산더미가 나왔다. 이그니시아는 포크와 나이프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베일을 살짝 걷어 올리고(줄리앙은 그때 날카로운 송곳니를 얼핏 보았다), 고기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우득, 콰직, 쩝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줄리앙은 비위가 상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금화 주머니를 보며 참았다.


‘저게 다 내 돈이다. 참자. 저 여자는 걸어 다니는 금광이다.’



3. 속전속결 계약 결혼


식사가 끝나갈 무렵, 이그니시아가 줄리앙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의 눈이었다. (줄리앙은 이걸 ‘써클렌즈’라고 생각했다.)


“너는 튼튼해 보이는군. 뼈대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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