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초면부터 부모 행세를 하는가
1950년대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릭 번은 인간관계를 거대한 역할극으로 정의했다. 그의 이론인 '교류 분석(Transactional Analysis)'에 따르면, 인간은 대화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세 가지 자아 중 하나를 꺼내 든다. 부모(Parent), 어른(Adult), 그리고 자식(Child).
문제는 이 역할 분담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제될 때 발생한다. 흰 지팡이를 짚거나 안내견과 함께 거리에 나서는 순간, 시각장애인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자동적으로 '무력한 자식'의 배역을 부여받는다.
길을 걷다 보면 예고 없이 팔을 잡아끄는 낯선 손길들을 마주한다. 에릭 번의 이론을 빌리자면, 그들은 '양육하는 부모'의 가면을 쓰고 있다. "앞이 안 보이니 내가 돌봐줘야 한다"는 시혜적인 본능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서 당사자에게 선택권은 없다. 호의를 거절하고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은 '양육하는 부모'에서 순식간에 '비판하는 부모' 혹은 '박해자'로 돌변한다.
"도와줘도 난리야?"라는 비난. 이것은 전형적인 '심리 게임'이다. 구원자가 피해자를 구출하려다 실패하자 박해자가 되는 지긋지긋한 삼각관계가 길 위에서 반복된다.
그렇다면 건전한 관계란 무엇인가. 에릭 번은 '어른 대 어른(Adult to Adult)'의 교류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감정이나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대등한 관계다.
이 이상적인 모델의 표본은 칸트 철학을 전공한 파트너 보보에게서 발견된다.
ENTP 성향의 그녀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녀에게 시각장애인 파트너는 '돌봐줘야 할 미성숙한 자식'이 아니라, '불편함만 제거하면 제 몫을 하는 동등한 어른'이다.
그녀의 배려는 감성적이라기보다 공학적이고 건축적이다. 예를 들어, 복잡한 터치 패널로 된 세탁기 위에 투명한 점자 스티커를 붙여놓는 식이다.
"내가 대신해줄게(부모)"가 아니라, "이거 붙여놨으니까 네 빨래는 네가 돌려(어른)"라는 태도. 덕분에 세탁은 기계가 하고, 건조기에 옮기는 건 시각장애인 파트너의 몫이 된다. 이것은 완벽한 분업이자, 상대를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하는 고도의 존중이다.
물론, 24시간 이성적인 '어른'으로만 살 수는 없다. 에릭 번도 가끔은 '자유로운 자식'의 상태가 필요하다고 했다. 평소엔 합리적이고 생활력 강한 보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산다. 치열한 논쟁 끝에 뜬금없이 애교를 부리거나 뽀뽀를 요구하는 순간들이 그렇다.
이것은 퇴행이 아니다. 치열한 이성의 시간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휴식이다. 밖에서는 낯선 이들이 무례하게 "반항하는 자식" 취급을 하지만,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는 "자유로운 자식"이 되어 서로에게 무장 해제될 수 있는 관계. 단, 설거지통 앞에서는 다시 냉철한 어른으로 돌아와야 한다. "설거지는 오빠 담당"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타협할 수 없는 칸트의 엄격함이 서려 있으니까.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서로에게 부모 노릇을 하려 드는 본능을 억제해야 한다. 도움을 줄 때는 상대의 의사를 먼저 묻고(어른), 거절당하면 쿨하게 물러나는 것(어른). 상대를 '장애인'이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고유한 이름을 가진 한 명의 개인으로 대우하는 것.
오늘도 낯선 행인이 팔을 잡아끈다면, 정중하게 팔을 빼며 '어른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선생님, 제 앞가림은 제가 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갈 길 가시죠."
우리는 모두 타인의 구원자가 되기엔, 각자의 인생을 책임지기에도 이미 충분히 바쁜 어른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