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왕의 러닝머신 위에서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기이하고도 숨 가쁜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앨리스가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달리는데, 아무리 달려도 주변 풍경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앨리스가 이유를 묻자, 여왕은 서늘하게 대답한다.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 달려야 해."
진화생물학자 리 밴 베일른은 이 기묘한 동화 속 장면을 빌려 '붉은 여왕의 역설'이라는 이론을 정립했다. 포식자가 빨라지면 피식자도 빨라져야 하고, 기생충이 진화하면 숙주도 면역계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쌍방이 죽을힘을 다해 질주하지만, 상대적인 힘의 균형은 언제나 제자리다. 전진하지 않는 것은 정지가 아니라, 곧장 '도태'로 직행하는 급행열차다.
이 살벌한 생물학 이론은 매일 아침 손바닥 위 스마트폰에서 현실이 된다. 비장애인들에게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는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을 의미하는 설레는 선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게 그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의 급변'이다.
어제까지 잘 쓰던 배달 앱의 버튼 위치가 바뀐다. 은행 앱의 보안 키패드 방식이 변경된다. 그러면 사용자는 순식간에 '금융 문맹'이자 '끼니를 해결 못 하는 무능력자'로 전락한다.
멈춰있지 않았다. 어제와 똑같이 살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플랫폼이 제멋대로 진화해 버린 탓에, 도태되지 않으려면 매뉴얼을 다시 외우고, 보이스오버 제스처를 새로 익혀야 한다.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어제처럼 밥을 먹고, 송금하기 위해서다. 죽도록 공부해야 겨우 '보통의 삶'이라는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붉은 여왕이 내린 저주가 아닐까.
시선을 자연으로 돌려보자. 마다가스카르에는 꿀샘의 깊이가 무려 25센티미터나 되는 기괴한 난초가 있다. 그리고 그 꿀을 먹기 위해 25센티미터짜리 혀를 가진 박각시나방이 존재한다.
난초는 꿀을 도둑맞지 않고 꽃가루를 묻히기 위해 꿀샘을 깊게 만들었고, 나방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혀를 늘렸다. 그 결과 둘 다 괴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낭만적인 공생이 아니라, 서로의 목덜미를 겨눈 처절한 '군비 경쟁'이다.
인간의 삶도 이 전쟁터에서 예외가 아니다. 칼이 날카로워지면 방패가 두꺼워지듯, 사회적 스펙이 상향 평준화될수록 개인의 노력도 끝없이 인플레이션 된다. 박사 학위를 따면 끝일 줄 알았더니, 이제는 연구 실적과 프로젝트 수주라는 더 빠른 트랙이 기다리고 있다. 멈추는 순간 굴러 떨어지는 러닝머신 위에서 현대인은 모두 25센티미터짜리 대롱을 가진 나방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역설은 사회적 관계, 특히 사랑에도 적용된다.
연인 관계는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는 러닝머신과 같다. 파트너 보보는 칸트 철학을 전공한 ENTP 답게 끊임없이 새로운 사유를 탐구하고, 패션과 향기라는 감각적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사람이다. 만약 "눈이 안 보이니까 여기 머물래"라고 안주한다면?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도, 심리적으로는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타인이 될 것이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것이다.
그녀가 속도를 높이면 보이스오버의 속도를 2배속으로 높여 정보를 습득해야 하고, 그녀가 새로운 니치 향수를 뿌리고 오면 후각의 데이터베이스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의 진화 속도를 맞춰야만, 비로소 '연인'이라는 관계의 평형 상태가 유지된다.
가끔은 25센티미터 꿀샘을 가진 난초가 되어버린 삶이 혹은 매일 새로운 기술을 배우느라 헐떡이는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 땀 흘리지 않는 존재는 화석이 된 존재뿐이다.
지금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 이유는 멸종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촌스럽지 않게 늙어가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지팡이 대신 안내견 탱고의 리드줄을 잡고, 보이지 않는 트랙 위를 전력 질주한다.
비록 풍경은 제자리일지라도, 종아리 근육은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