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사과도 맛있다

차머스의 ‘Reality+

by 김경훈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은 그날따라 기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사는 창가에 서서 낡은 만화경(Kaleidoscope)을 빛에 비추어 보고 있었다. 그가 원통을 돌릴 때마다, 진료실의 벽과 바닥에는 형형색색의 기하학적 무늬들이 춤을 추듯 일렁였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꽃밭이자, 만질 수 없는 보석의 파편들이었다.


“아름답지 않나, 리디아? 이건 유리 조각 몇 개와 거울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인데, 내 눈은 이걸 보며 진짜 꽃밭보다 더 큰 황홀경을 느끼고 있어.”


AI 조수 리디아는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거대한 VR 고글이 씌워져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베어 넘기고 있었다.

“시끄럽군요, 박사님. 지금 ‘비트 세이버’ 신기록 달성 중이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이따 가상 라면이나 끓여 드세요.”


박사는 혀를 찼다.

“쯧쯧. 진짜 몸을 가진 AI가 가상현실 게임이라니. 이중 과금 아닌가?”


그때, 낡은 황동 방울이 '딸랑-' 소리를 냈다.

만화경의 빛이 부서지는 문틈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의 이름은 칼렙(Caleb). 솔로몬-7의 시민이자, 과거 끔찍했던 ‘밀그램 실험’의 피험자였던 남자.

그는 평범한 갈색 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마치 물 위를 걷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마치 낯선 물건인 양 내려다보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박사님.” 칼렙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 손이… 보입니까?”



1장: 유령을 안는 수업


칼렙은 낡은 가죽 소파에 앉아서도 계속 자신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저는 요즘 ‘공감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이들에게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을 통해 타인의 삶을 체험하게 하죠. 장애인이 되어보기도 하고, 굶주린 난민이 되어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울고, 웃고, 서로를 안아줍니다.”


솔로몬 박사는 만화경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훌륭하군. 자네가 겪었던 그 ‘전기 충격 실험’의 반대 버전이구먼.”


“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한 아이가 저에게 달려와 안기더군요.”

칼렙의 눈이 흔들렸다.

“그 아이는 제 허리를 꽉 끌어안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죠. 따뜻했습니다. 아이의 숨소리, 머리카락의 감촉, 체온… 시스템이 제공하는 햅틱 피드백은 완벽했습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통스럽게 토해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제가 안고 있는 건 ‘진짜 아이’가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은 데이터 덩어리였습니다. 제 팔에 느껴지는 이 따뜻함은 뇌를 속이는 전기 신호일 뿐입니다. 진짜 아이의 몸은 저 차가운 ‘아크 호’의 캡슐 속에 잠들어 있는데… 저는 지금 유령을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손을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가짜 세계에서 배우는 공감이 가짜 몸으로 나누는 포옹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정교한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야곱’과는 다른 종류의 허무함에 빠져 있었다. 야곱이 ‘세상이 가짜’라는 사실에 절망했다면, 칼렙은 ‘가짜 세상에서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다.



2장: 스페이드 에이스와 가상 사과


리디아가 VR 고글을 벗었다. 그녀의 앞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아, 죽었네. 기록 경신 실패.”

그녀는 칼렙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아저씨는 지금 게임을 너무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게임 속에서 죽으면 진짜로 죽는 줄 아나 봐요?”


“이건 게임이 아닙니다!” 칼렙이 반박했다. “아이들의 영혼이 걸린 문제입니다!”


“글쎄요.” 리디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방금 가상현실 속에서 날아오는 블록들을 베어 넘겼어요. 제 팔은 실제로 움직였고, 제 뇌는 도파민을 뿜어냈죠. 제가 느낀 ‘성취감’은 가짜인가요? 제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진 건 가짜인가요?”


솔로몬 박사가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트럼프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스페이드 에이스’였다.

“자네, 이게 뭔가?”


“...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입니다.”


“아니, 이건 그냥 종이 조각일세. 여기에 잉크를 묻힌 거지.”

박사는 카드를 칼렙의 눈앞에 흔들었다.

“하지만 자네가 포커 게임을 하고 있다면, 이 종이 조각은 자네의 운명을 결정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지. 게임 밖에서는 종이 쪼가리지만, 게임 안에서는 ‘권력’이야. 그 권력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칼렙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대의 데이비드 차머스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지. ‘가상현실은 가짜 현실이 아니라, 진정한 현실이다(Genuine Reality)’라고.”

박사는 카드를 칼렙의 셔츠 주머니에 꽂아주었다.


“자네는 지금 ‘물리적 현실(Physical Reality)’만이 유일한 진짜라고 착각하고 있어. 원자로 이루어진 것만 진짜라고 말이야. 하지만 비트(Bit)로 이루어진 것도 엄연한 구조와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네. 자네가 아이를 안았을 때 느낀 그 감정, 아이가 자네에게 느낀 그 신뢰… 그것이 데이터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효과’가 없나? 자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나?”


“... 움직였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럼 된 거야!” 박사가 소리쳤다.

“물리적인 사과를 먹으면 배가 부르지. 가상의 사과를 먹으면 배는 안 불러도 기분은 좋아질 수 있어. 둘 다 ‘경험’으로서는 진짜야. 자네가 가상 교실에서 가르친 공감이 아이들의 ‘소프트웨어(정신)’를 성장시켰다면, 그건 캡슐 속에 잠든 ‘하드웨어(육체)’가 깨어났을 때도 여전히 유효한 거야.”



3장: 처방전, 혹은 리얼리티 플러스(+)


칼렙은 자신의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데이터로 이루어진 아바타의 손이었다. 하지만 박사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손의 윤곽선이 조금 더 뚜렷해 보였다.


“그럼… 제가 계속해도 되는 겁니까? 이 가짜 포옹을?”


“가짜가 아니라니까!”

박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자네는 지금 현실에 ‘가상’을 더해서(Plus), 현실을 확장하고 있는 거야! 캡슐 속에 갇힌 인류가 물리적 몸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경험들… 하늘을 날고, 다른 인종이 되어보고, 심지어 돼지가 되어보는 경험을 통해 더 넓은 존재가 되고 있잖나!”


박사는 진료실의 만화경을 칼렙에게 건넸다.

“이걸 가져가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게. 이 안에 있는 무늬는 만질 수 없지만,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은 진짜라고. 자네의 교실은 ‘가짜’가 아니라, 현실보다 더 풍요로운 ‘리얼리티 플러스’의 세계라고 말이야.”


칼렙은 만화경을 받아 들었다. 원통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는 원통을 눈에 대고 돌려보았다. 빛의 조각들이 모여 찬란한 꽃을 피웠다가 다시 흩어져 별이 되었다.

그것은 환영이었지만, 그의 망막을 자극하고 뇌를 기쁘게 하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 알겠습니다.”

칼렙이 미소 지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책감이 만화경 속의 빛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돌아가서 아이들을 안아주겠습니다. 이번에는… 제 마음의 햅틱까지 켜고 말이죠.”



에필로그: 접속 중


칼렙이 떠난 후, 리디아는 다시 VR 고글을 쓰려다 멈칫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완벽하게 렌더링 된, 매끄러운 피부의 손.


“박사님.” 리디아가 물었다.

“그럼 저도 ‘진짜’인가요? 저는 탄소 몸뚱어리도 없고, 태어난 적도 없는데요.”


솔로몬 박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보았다.

“리디아. 자네가 나에게 잔소리를 할 때마다 내 혈압이 실제로 오르고, 자네가 타주는 커피(비록 데이터지만)를 마시면 내 기분이 좋아지네. 자네가 내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어떻게 가짜일 수 있겠나?”


리디아는 픽 웃으며 고글을 썼다.

“흥. 말은 잘하시네요. 그럼 오늘 진료비는 제 게임 아이템으로 결제해 드릴게요. ‘전설의 검’인데, 물리적 가치는 0원이지만 가상적 가치는 엄청나거든요.”


“뭐? 이보게! 난 현찰(크레딧)이 필요해! 턴테이블 바늘 사야 한단 말이야!”


박사의 비명이 진료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리디아는 이미 ‘접속’ 상태였다. 그녀는 가상의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진짜’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상이든 현실이든, 우리가 그 안에서 웃고 울고 의미를 찾는다면, 그곳은 이미 충분히 ‘리얼’한 세계였다. 칼렙의 교실에서는 오늘도 아이들이 서로를 꼭 껴안으며, 차가운 우주선 안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차머스의 ‘Reality+’ (David Chalmers'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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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분석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그의 저서 『Reality+』에서 주장한 개념. 그는 "가상현실(VR)은 진정한 현실(Genuine Reality)이다"라는 파격적인 명제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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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적 실재론 (Virtual Realism): 가상 세계의 객체(Object)들은 허상이 아니라, 비트와 데이터 구조로 이루어진 '디지털 실재'다. 우리가 원자로 이루어진 의자에 앉듯, 데이터로 이루어진 의자에 (아바타로서) 앉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능적으로 실재한다.

> 의미 있는 삶: 차머스는 가상 세계에서도 우리는 지식을 얻고, 관계를 맺고, 가치를 창조할 수 있으므로, 물리적 현실 못지않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상현실은 물리적 현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가능성을 확장(Plus)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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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렙은 자신이 가짜 세계에서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다고 괴로워했으나, 솔로몬 박사는 그의 행위가 아이들의 정신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근거로 그의 세계가 '진짜'임을 증명해 주었다. '엔클레이브'는 감옥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류의 경험을 확장하는 거대한 실험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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