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의 아키텍처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들

by 김경훈


생물학 용어 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 가장 비장하고도 숭고한 단어를 꼽자면 단연 '아폽토시스(Apoptosis)'일 것이다. 이는 세포가 예정된 프로그램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현상, 즉 '세포 자살'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생명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지만, 탄생의 순간부터 생명은 죽음을 재료로 완성된다.

태아의 손은 초기에는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물개의 앞발처럼 뭉툭한 형태다. 이때 손가락 사이를 채우고 있던 세포들이 "아,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깨끗하게 자살(아폽토시스)을 택함으로써 비로소 다섯 개의 손가락이 드러난다. 만약 이 세포들이 죽지 않고 버텼다면, 인류는 피아노를 칠 수도, 스마트폰의 키패드를 두드릴 수도 없는 '오리발'을 가진 존재로 남았을 것이다.

엉덩이의 꼬리 역시 마찬가지다. 꼬리 세포들이 스스로 소멸해 준 덕분에 인간은 척추를 곧게 펴고 직립 보행을 하며, '원초적 동물'의 단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자연에서도 이 현상은 매년 반복된다.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나무가 병들어서가 아니라, 내년의 성장을 위해 불필요해진 잎들을 과감하게 '구조조정'하는 과정이다.

인체의 모든 세포는 끊임없이 뇌에게 묻는다. "저 아직 쓸모 있나요?"

뇌는 유용한 세포에게는 성장을, 임무가 끝난 세포에게는 죽음을 명령한다. 이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세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유기체 전체가 건강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이 엄중한 질서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반란군'이 존재한다.

뇌가 "너는 이제 사라져라"라고 명령했는데도, "싫은데? 나 안 죽을 건데?"라며 버티는 세포들. 그들은 아폽토시스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끝없이 증식하며 불멸을 꿈꾼다.

우리는 이들을 '암세포'라고 부른다.

부분이 전체를 위해 죽기를 거부할 때, 역설적으로 전체(몸)가 죽게 된다. 암은 생명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과잉 생명력, 즉 '물러날 때를 모르는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다.



이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칸트 철학을 전공한 파트너 보보의 '옷장 정리' 철학에서도 발견된다.

패션에 민감한 그녀의 드레스룸은 언제나 신상과 빈티지가 공존하지만, 결코 넘치지 않는다. 그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냉철한 뇌가 되어 옷가지들에게 묻는다.

"너는 내 패션의 목적에 부합하는가 아니면 공간만 차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는가?"


더 이상 설렘을 주지 않는 옷, 유행 지난 핏(Fit)을 가진 옷들에게 그녀는 가차 없이 '패션 아폽토시스'를 명한다.

"너의 희생으로 신상 코트가 들어올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녀에게 옷을 버리는 행위는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한 필수적인 '삭제' 과정이다. 만약 그녀가 모든 옷을 아까워하며 끌어안고 살았다면(암세포처럼), 집은 옷무덤이 되어 거주자의 숨통을 조였을 것이다.



비단 육체와 옷장뿐일까. 인생의 아키텍처 역시 무엇을 더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삭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불필요한 걱정,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 나를 갉아먹는 유해한 관계. 이 낡은 세포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이별'을 고하지 못하면, 마음은 비대해진 암덩어리처럼 무거워진다.


연구자가 논문을 쓸 때도 가장 필요한 능력은 자료 수집이 아니라, 수집한 자료 중 90%를 버리는 과감함이다. 핵심 논지를 흐리는 문장들을 아폽토시스 시켜야만,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결론이 손가락(형태)처럼 드러나는 법이다.



우리는 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세포의 지혜는 말한다. 때로는 '어떻게 사라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버려야 인간의 손을 얻듯, 낡은 것을 제때 떠나보내는 용기야말로 성장의 필수 조건이다.


오늘 저녁, 보보가 세탁기에 빨래를 넣으면 건조기에 옮겨 담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젖은 빨래(과거)를 건조기(변화의 과정)에 넣고 뽀송하게 말리는 것 역시 일상의 작은 순환이다.

물론, 보보가 아폽토시스 시킨 옷들을 몰래 주워 입다가 걸리면 등짝을 맞겠지만 말이다.

"자기야, 그거 핏이 안 산다고! 제발 좀 버려!"

그녀의 잔소리는 내 패션의 진화를 위한 뇌의 명령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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