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테메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지식의 역사를 단순한 학문 발전의 축적이 아닌, 특정 시대의 지적 토대와 기본 방향을 규정하는 '에피스테메(Épistémè)'의 변화로 설명했다. 에피스테메는 특정 시대의 모든 학문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무의식적인 지식의 토대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시대의 눈'과 같다.


대상이 동일한 연구라도 에피스테메가 변하면 그 시점은 완전히 달라진다. 푸코는 르네상스(16세기), 고전주의(17~18세기), 근대 인본주의(19세기)로 이어지는 에피스테메의 단절적인 변화를 제시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인간을 주체로 삼았던 인본주의 시대가 끝나고 네 번째 에피스테메가 도래할 것을 암시했다. 오늘날 인터넷, AI, 빅데이터로 상징되는 기술 환경은 바로 이 네 번째 에피스테메, 즉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시대'를 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푸코의 관점을 '정보 접근성(Information Accessibility)'이라는 학문 분야에 적용해 보자.



시대 구분 / 에피스테메의 특성 / 정보 접근성의 시점 /


고전주의 / 분류, 표(表), 시각적 질서 강조 / 결핍의 시대: '시각 정보'가 절대적 질서의 기준. 시각장애는 개인의 '결핍'이자 '부재'. /


근대 인본주의 / 인간 주체, 노동, 인간 중심의 과학 / 의무의 시대: 인권, 장애인 복지, 차별 금지법에 근거한 '최소한의 의무'. 기술적 보조(스크린 리더)를 통한 개인의 '보충'. /


네 번째 에피스테메 / 데이터, 알고리즘, 연결, 비정형성 / 지능형 공존의 시대: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맥락과 환경을 분석하여 정보를 개인에게 '맞춤형으로 제공'. 시각장애 자체가 독특한 '데이터 처리 방식'으로 재해석. /




현재까지 정보 접근성은 주로 '근대 인본주의 에피스테메'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것은 '장애를 가진 인간도 동등하게 정보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인권 중심의 접근 방식이다. 법적 의무를 통해 웹사이트에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거나, 공공시설에 점자 블록을 설치하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네 번째 에피스테메, 즉 AI와 데이터 시대가 지배적이 되면 그 토대는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현재: 시각장애인은 앱을 사용할 때마다 버튼에 일일이 점자 스티커를 붙이거나(손수 하는 배려), 스크린 리더(개인의 노력)를 이용해 텍스트를 읽어내야 한다.


미래: 지능형 시스템은 사용자가 앱을 여는 순간, 사용자의 위치, 맥락, 선호도를 파악하여 정보를 청각적 혹은 촉각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렌더링'해준다. 복잡한 표를 접하면, AI가 자동으로 핵심 정보만 뽑아 음성 요약본을 제공하는 식이다.


이러한 미래의 접근성은 '의무'가 아니라 '기술의 기본값(Default)'이 된다. 시각장애를 가진 존재는 더 이상 '보완'의 대상이 아니라, '청각 및 촉각 정보 처리'에 특화된 독특한 수용자로 재정의된다. 기술은 모든 인간을 '다름'이라는 데이터로 보고, 그 데이터를 최적화하여 출력할 뿐이다.



미셸 푸코는 지식의 유행이 곧 시대를 정의한다고 보았다.

만약 미래의 에피스테메가 데이터와 AI라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기술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토대를 윤리적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파트너 보보가 숭상하는 칸트 철학처럼, AI라는 새로운 지식의 준칙이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네 번째 에피스테메의 승자는 '가장 많은 지식을 축적한 자'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의 유행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삭제하지 않은 자'가 될 것이다. 시대가 눈을 바꿀 때, 우리는 그 변화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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