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의 아키텍처

빛의 방향이 결정하는 뇌의 생사

by 김경훈


다큐멘터리 제작자 피터 엔텔은 그의 작품 <튜브>에서 흥미로운, 아니 섬뜩한 실험 하나를 소개한다. 그는 관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똑같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변수는 단 하나, '빛의 방향'이었다.

A그룹은 영화관처럼 영사기를 등 뒤에 놓고 스크린에 반사된 빛을 보게 했고, B그룹은 텔레비전처럼 영사기를 정면에 놓고 쏟아지는 빛을 직접 받게 했다.


실험 종료 후 인터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반사된 빛을 본 A그룹은 영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 능력이 살아있었던 반면, 정면에서 빛을 맞은 B그룹은 멍한 상태로 수동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심지어 뇌파 측정 결과, B그룹의 두뇌 활동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피터 엔텔은 이를 두고 '정신 기능의 쇠퇴'라고 명명했다.

즉,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처럼 빛이 눈으로 직접 꽂히는 매체는 시신경을 통해 뇌를 강제로 '로그오프' 시키는 마취 총과 같다는 것이다. 거리가 사라진 곳에 비판적 사유가 들어설 틈은 없다.



이 실험 결과는 시각장애인 연구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역설적이게도, '빛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오히려 뇌를 가장 활발하게 각성시키는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은 화면의 빛을 정면으로 받지 않는다. 대신 '소리(Audio)'를 듣는다. 화면해설이나 TTS(Text-to-Speech)를 듣는 과정은 수동적일 수 없다. "주인공이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본다"라는 해설을 듣는 순간, 청자의 뇌는 '씁쓸한 표정'과 '창밖의 풍경'을 머릿속 캔버스에 능동적으로 그려내야 한다.

이것은 입력된 데이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뇌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재조립하고 건축하는 고도의 '생성형 프로세스'다.

비장애인이 멍하니 빛을 쬐며 뇌의 휴식(혹은 퇴화)을 즐길 때, 보이지 않는 이들은 치열하게 뇌의 시냅스를 연결하며 자신만의 영화를 찍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정면의 빛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좀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피터 엔텔의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강력한 예외 사례가 존재한다. 바로 칸트 철학을 전공한 파트너 보보다.


그녀는 유튜브 앞에서도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그녀는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와 '논쟁'을 한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비윤리적인 선택을 할 때마다, 그녀는 화면을 향해 칸트의 정언명령을 설파한다.

"야!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어? 저거 완전 도덕적 해이네."


그녀에게 TV 화면은 마취제가 아니라, 비판적 이성을 날카롭게 가는 숫돌이다. 그녀는 쏟아지는 빛을 그대로 흡수하는 대신, 자신의 철학적 프리즘을 통해 굴절시키고 분해하여 받아들인다.

보보처럼 화면과 자신 사이에 '사유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빛의 방향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뇌는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쌩쌩하게 돌아가며, 범인의 행동 심리를 분석하느라 열을 올린다.



현대인은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빛나는 사각형(스마트폰, 모니터)과 마주하며 보낸다. 피터 엔텔의 경고대로라면, 인류의 뇌는 서서히 퇴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빛의 공습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가끔은 눈을 감고 소리에만 집중하며 머릿속에 '내면의 영사기'를 돌려보는 것.

둘째, 보보처럼 화면을 향해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을 던지며 시비를 거는 것.


수동적인 관객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까칠한 비평가가 될 것인가.

선택은 리모컨을 쥔 손이 아니라, 그 빛을 받아내는 뇌의 태도에 달려 있다.


오늘 저녁, 보보가 보는 드라마 옆에서 눈을 감고 소리만 들어본다.

시각 정보가 차단된 어둠 속에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오히려 더 선명한 입체감을 가지고 뇌를 두드린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초고화질(High Definition) 상상력'이 아닐까.

물론, 옆에서 들려오는 "저 놈 저거, 순수이성비판 좀 읽어야겠네"라는 보보의 추임새가 몰입을 좀 방해하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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