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유리관 속의 여왕,
1. 향수 설명
‘샤넬 넘버 5(N°5)’는 설명이 필요 없는 향수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21년 가브리엘 샤넬이 "여자의 냄새가 나는 여자의 향수"를 의뢰해 탄생했다.
당시 유행하던 한 가지 꽃향기(Soliflore)를 거부하고, 80여 가지 성분을 복잡하게 배합한 최초의 '추상적 향수'다.
특히 알데하이드(Aldehyde)라는 합성 향료를 과감하게 사용하여 향수 역사를 바꿨다.
마릴린 먼로가 "잠잘 때 이것만 입는다"고 말해 불멸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현대인의 코에는 다소 진하고 고전적인, 호불호가 갈리는 '어른의 향기'이기도 하다.
2. 노트 구성
탑 노트 (Top Notes): 알데하이드, 일랑일랑, 네롤리, 베르가못
넘버 5의 정체성이다. 알데하이드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이는 샴페인의 기포처럼 톡 쏘면서도, 차가운 금속이나 빳빳한 비누 거품을 연상시키는 쨍한 느낌을 준다. 자연에는 없는 인공적이고 혁신적인 첫인상이다.
미들 노트 (Middle Notes): 메이 로즈(May Rose), 재스민, 아이리스, 은방울꽃
최고급 그라스산 장미와 재스민이 풍성하게 피어나지만, 알데하이드의 영향으로 생화의 느낌보다는 잘 다듬어진 '꽃다발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여기에 아이리스의 파우더리함이 더해져 화장품 분 냄새 같은 고전적인 느낌을 만든다.
베이스 노트 (Base Notes): 샌달우드, 바닐라, 오크모스, 베티버
시간이 지나면 비누 향은 옅어지고, 바닐라와 샌달우드의 부드럽고 관능적인 잔향이 피부에 깊게 남는다. 아주 따뜻하고 농염하다.
3. 전체적인 리뷰
"향수란 이런 것이다"라고 웅변하는 듯한 교과서적인 향이다.
우아하고, 기품 있으며, 압도적인 여성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만큼 무겁고 진지하다.
청바지나 티셔츠 차림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으며, 누군가에게는 '우아한 귀부인'으로, 누군가에게는 '진한 화장을 한 할머니'로 기억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녔다.
박물관 유리관 속의 여왕, 샤넬 넘버 5 알현기
세상에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있고, 감히 친구 먹자고 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은 존재가 있다.
오늘 만난 ‘샤넬 넘버 5’는 명백히 후자다.
그녀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왕의 자리를 지켜온 살아있는 전설이다.
마릴린 먼로의 잠옷이자, 모든 여성의 로망이라 불리는 그녀.
과연 그녀가 여전히 현역에서 통하는 세련된 여왕일지, 아니면 박물관에 박제된 화석일지, 떨리는 마음으로 알현실에 들어섰다.
그녀의 등장은 친절한 인사가 아니라, 차가운 금속성의 충격이다.
향수 역사를 바꿨다는 그 유명한 알데하이드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코를 찌른다.
이것은 꽃향기가 아니다.
한겨울의 차가운 눈밭 냄새 같기도 하고,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가 젖은 천에 닿을 때 나는 ‘치이익’ 하는 소리를 후각으로 옮겨놓은 것 같기도 하다.
“감히 나를 평가하려 들어?”라고 쏘아붙이는 듯한, 도도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첫인상.
자연스러운 풀냄새 따위는 천박하다고 비웃는 듯한 인공적인 완벽함이다.
그 서늘한 기선 제압이 끝나면,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본모습인 거대한 꽃밭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장미와 재스민들은 흙에서 자란 생명이 아니다.
금과 보석으로 세공하여 유리관 안에 전시해 놓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조화(造花)들이다.
생화 특유의 풋내나 물비린내는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숨 막힐 듯한 분(Powder) 냄새다.
아이리스 뿌리와 일랑일랑이 뒤섞인 이 향기는 100년 전 여배우의 분장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두껍게 바른 파운데이션, 붉은 립스틱, 그리고 벨벳 커튼의 먼지 냄새가 섞여 있다.
누군가는 이를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라고 미화하지만, 비판적으로 맡으면 이것은 ‘답답함’이다.
환기가 전혀 되지 않는 방 안에서 옛날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 어르신을 마주한 기분이다.
시간이 흘러 바닐라와 샌달우드가 남을 때쯤에야 비로소 그녀는 긴장을 풀고 인간적인 온기를 내어준다.
그제야 느껴지는 관능미는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격식이 느껴진다.
그녀는 결코 편안한 츄리닝 차림을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하지 않으면, 그녀의 향기에 잡아먹히고 만다.
샤넬 넘버 5는 향수가 아니라 ‘문화유산’이다.
그녀는 박물관의 가장 높은 곳, 방탄유리 안에 전시된 여왕의 왕관이다.
바라보며 감탄하기에는 완벽하지만, 꺼내서 매일 쓰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부담스럽다.
시각 정보 없이 그녀를 느끼면, 화려하지만 차가운 대리석 조각상을 껴안는 기분이 든다.
아름답다.
웅장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21세기의 거리보다는 20세기의 흑백 영화 속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다.
가끔은 그 고전미가 그리울 때가 있겠지만, 매일 아침 그녀를 모시기에는 우리네 삶이 너무 바쁘고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