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는 결단이다
철학자들은 "모래알 몇 개부터가 모래 산인가?"를 두고 수천 년간 논쟁해 왔다. 이것이 바로 '모래 산의 역설'이다. 세상의 모든 개념은 본질적으로 모호하다.
하지만 문헌정보학의 세계, 특히 도서관의 서가는 이 모호함을 단 1초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책이 '생명윤리'를 다루고 있다고 치자. 이 책은 과학(500)인가 철학(100)인가? 만약 우리가 "이 책은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니 대충 중간쯤에 꽂자"라고 한다면, 그 책은 영영 검색되지 않는 미아(Missing)가 된다.
사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책의 주된 관점은 철학이므로 100번대에 꽂는다."
이 선언적인 '경계 짓기(Demarcation)'야말로 정보 서비스의 시작이다. 윌리엄슨이 말했듯, 경계선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어야만' 비로소 존재한다.
윌리엄슨은 애매한 영역에 '청소년' 같은 새로운 이름을 붙여 해결하라고 제안했다.
이것은 정보학에서 말하는 '통제 어휘(Controlled Vocabulary)'의 원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용자들이 "컴퓨터", "PC", "계산기"라고 제각각 검색할 때, 정보 시스템은 혼란(모래 산)에 빠진다. 이때 정보 전문가는 "이 모든 개념을 '전자계산기'라는 하나의 용어로 통칭한다"라고 경계선을 긋는다.
내가 연구하는 정보 접근성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에게 '이미지'란 무엇인가? 볼 수 없는 것? 무의미한 것? 아니다. 나는 여기에 '대체 텍스트가 필요한 정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명명하는 순간, 그 막연했던 이미지는 '관리하고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명확해진다. 이름을 붙이는 자가 정보의 주도권을 쥔다.
최근 나는 정보 리터러시 교육이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경계선을 긋는 훈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정보 검색에 서툰 사람들의 특징은 키워드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검색창에 "좋은 맛집", "재밌는 거" 같은 모래 산(애매한 단어)을 입력한다. 결과는 정보 과잉(Information Overload)이다.
리터러시 교육의 핵심은 학습자에게 윌리엄슨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좋은'의 기준이 뭡니까? 가격인가요, 거리인가요, 아니면 평점인가요?"
사용자가 "반경 1km 이내, 평점 4.0 이상"이라는 명확한 경계선을 긋도록 유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검색 전략(Search Strategy)'이다. 훌륭한 검색은 모호한 욕망을 명료한 언어로 베어내는 칼질에서 시작된다.
세상은 장애와 비장애를 의학적 수치(시력 0.1 이하 등)로 나눈다. 하지만 정보학적 관점에서 내가 긋는 경계선은 다르다.
나에게 장애란 '눈이 안 보이는 상태'가 아니라,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상태'다.
반대로, 눈이 보여도 키오스크를 못 쓰는 노인은 정보학적 관점에서 '장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윌리엄슨의 조언대로 나는 이 애매한 영역에 '정보 약자(Information Vulnerable)'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경계선을 다시 그으면, 문제의 본질은 '신체적 치료'가 아니라 '정보 환경 개선'으로 이동한다. 내가 스스로 그은 이 선 안에서 나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라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민'이 된다.
경계선은 누군가가 그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그어야 한다.
이 말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대로 휩쓸려 다니면, 우리는 거대 기업이 분류해 놓은 '소비자 타겟 그룹 A'라는 모래알 중 하나로 전락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스스로 경계선을 긋고 검색한다면, 우리는 정보의 주체(Subject)가 된다.
문헌정보학은 결국 이 세상의 무수한 모래알(데이터) 중에서 나에게 필요한 보석(지식)을 골라내기 위해 끊임없이 채를 치고 선을 긋는 학문이다.
모호함 속에 숨지 말자.
사랑인지 우정인지 헷갈릴 때 '무의식적 연애'라고 이름을 붙였던 텍스트 속 화자처럼, 우리도 쏟아지는 정보의 파도 앞에서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
"여기까지가 소음이고, 여기서부터가 내 지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