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유효한 5개의 헌법

랑가나단을 다시 읽다

by 김경훈

물리학에 뉴턴의 법칙이 있다면, 문헌정보학에는 인도의 수학자이자 사서였던 시얄리 라맘리타 랑가나단(S.R. Ranganathan)의 '도서관학 5법칙(Five Laws of Library Science)'이 있다.

1931년, 그는 도서관 운영의 본질을 꿰뚫는 다섯 문장을 발표했다.



1. 책은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2. 모든 독자에게 그/그녀의 책을.


3. 모든 책에게 그 독자를.


4. 독자의 시간을 절약하라.


5.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다.


학부 1학년 때 배우는 이 기초적인 명제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현대 정보학(Information Science)의 모든 알고리즘과 서비스 철학을 관통하는 거대한 뼈대다.



과거의 도서관은 책을 '보존(Preservation)'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책에 쇠사슬을 묶어두던 시절도 있었다. 랑가나단은 이를 뒤집었다. "책은 모셔두는 게 아니라, 닳고 닳도록 써야 한다."

현대 정보학에서 이 법칙은 '데이터 활용성(Usability)'으로 치환된다. 아무리 방대한 빅데이터를 구축해 놓아도, 그것이 분석되거나 서비스되지 않고 서버 안에서 잠자고 있다면 그것은 '죽은 데이터(Dark Data)'다.

시각장애인인 나에게 이 법칙은 더욱 절실하다. 접근성이 없어 읽을 수 없는 전자책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제1법칙은 "모든 정보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소비되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정보학의 실용주의 선언이다.



제2법칙(모든 독자에게 책을)과 제3법칙(모든 책에게 독자를)은 현대 '정보 검색(Information Retrieval)' 시스템의 양대 축인 '재현율(Recall)'과 '정확률(Precision)'의 철학적 기반이다.


제2법칙은 이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빠짐없이 찾아주는 것(재현율)을 의미한다. 이는 '롱테일(Long Tail)' 법칙과 연결되어, 소수의 마이너한 이용자라도 자신의 정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제3법칙은 구석에 박혀 있는 정보라도 딱 맞는 이용자를 찾아 연결해 줘야 한다는 것(추천 시스템)을 의미한다.

오늘날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개인화 추천 알고리즘'은 사실상 랑가나단의 제3법칙을 수학적으로 구현한 것에 불과하다. 사서가 하던 '북 큐레이션'을 AI가 대신하고 있을 뿐, "정보와 이용자의 최적 매칭(Matching)"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독자의 시간을 절약하라."

이 짧은 문장은 현대 정보 서비스의 'UI/UX(사용자 경험)' 디자인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다.

검색 속도를 0.1초 단축하기 위해 구글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는 이유, 복잡한 분류 체계를 단순화하는 이유, 원클릭 결제 시스템을 만드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정보학적 관점에서 이용자의 시간은 곧 '탐색 비용(Search Cost)'이다. 이 비용이 높으면 이용자는 서비스를 이탈한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스크린리더의 속도를 3배속으로 설정해 듣는 이유도 제4법칙을 본능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정보 획득 과정의 병목(Bottleneck)을 줄이는 것, 그것이 바로 최고의 정보 복지다.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다."

이것은 가장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법칙이다. 랑가나단은 도서관을 벽돌 건물이 아니라, 세포 분열을 하며 끊임없이 자라나는 '생명체(Organism)'로 보았다.

현대의 정보 환경을 보라. 데이터는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고, 새로운 미디어가 매일 탄생한다. 고정된 분류표나 꽉 막힌 서버 용량으로는 이 성장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정보 시스템은 언제나 '확장성(Scalability)'과 '유연성(Flexibility)'을 갖춰야 한다. 클라우드 컴퓨팅,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위키백과, 진화하는 LLM(거대 언어 모델)은 모두 제5법칙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시스템은 도태된다(죽는다). 이것은 생물학이자 정보학의 진리다.



기술은 현란하게 변한다. 어제는 메타버스였고, 오늘은 생성형 AI다. 하지만 우리가 다루는 업(業)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필요한 사람(User)'에게, '필요한 정보(Item)'를, '가장 빠른 시간(Efficiency)' 안에, '가장 적합한 방식(Matching)'으로 연결해 주는 일을 한다.


문헌정보학 개론 시간에 졸면서 들었던 그 다섯 줄의 문장 속에, 사실은 우리가 평생 고민해야 할 모든 화두가 들어 있었다.

나는 오늘도 이 100년 전의 헌법을 가슴에 품고, 21세기의 정보 바다를 항해한다.

AI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결국 이 5가지 원칙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될 테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전(Dictionary)의 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