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독재를 넘어선 '접촉'의 정보학
콩디야크는 시각을 '과도한 형이상학', 즉 환상을 만들어내는 감각이라 비판했다. 멀리 있는 산은 푸르게 보이지만, 가서 만져보면 거친 흙과 바위일 뿐이다. 시각은 거리를 두고 대상을 미화하거나 왜곡한다.
반면, 촉각은 '신중한 형이상학'이다. 내가 손을 뻗어 벽을 밀 때, 벽은 나를 밀어낸다. 이 물리적 '저항(Resistance)'이야말로 "여기에 무언가 실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정보학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디지털 세상은 시각의 독재(Ocularcentrism) 아래 놓여 있다. 4K 모니터, 화려한 UI, 딥페이크 영상... 눈은 끊임없이 속는다. 보기에 그럴듯한 가짜 뉴스와 피싱 사이트는 시각적 환상을 이용하여 우리 뇌를 해킹한다.
하지만 촉각은 속일 수 없다. 만질 수 없는 정보는 의심해야 한다. 진실은 언제나 단단한 저항값을 가지기 때문이다.
현대 정보 단말기의 가장 큰 비극은 '물리적 키보드의 소멸'이다. 스마트폰과 키오스크는 매끈한 유리(Touchscreen)로 덮여 있다.
시각장애인인 나에게 이 평면의 유리는 정보가 없는 사막과 같다. 볼록 튀어나온 버튼이 사라지면서 내가 누를 때 느껴야 할 '딸깍'하는 저항(확인)도 사라졌다. 콩디야크의 말대로라면, 저항이 없기에 정보의 실재감도 사라진 것이다.
정보 접근성 연구의 최전선은 이제 '햅틱(Haptic) 기술'로 향하고 있다. 스크린 위에서 손가락의 마찰력을 전기적으로 조절하여 질감을 만들어내거나, 점자 디스플레이처럼 물리적 핀을 융기시키는 기술.
이것은 단순한 편의 기능이 아니다. 가상의 정보(Pixel)에 물리적 실체(Atom)를 부여하여, 인간이 정보를 '몸'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복원'이다.
비장애인들은 정보를 눈으로 '훑는다(Browse/Scan)'. 이것은 빠르지만 피상적이다.
반면, 시각장애인은 점자를 손끝으로 '더듬는다(Grasp)'. 점자 하나하나의 요철을 느끼며 읽는 행위는 정보의 구조를 뼈대부터 만지는 일이다.
정보 리터러시 교육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감각은 바로 이 '촉각적 독해(Tactile Literacy)'다.
정보를 눈으로만 쓱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시각적 착각), 텍스트의 논리적 구조가 단단한지, 근거(Fact)라는 뼈대가 잡혀 있는지 꾹꾹 눌러보며 확인하는 태도.
콩디야크가 말했듯, "상상 속의 아픔과 실제의 아픔은 다르다." 겉만 번지르르한 정보와, 팩트로 꽉 찬 정보는 '만져봐야(검증해 봐야)' 안다.
텍스트에서 "사랑이건 우정이건 보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인간은 타인의 체온을 느낄 때 비로소 연결되었다고 믿는다.
정보 서비스(Information Service)도 마찬가지다. 챗GPT가 아무리 완벽한 답변을 줘도, 사람들은 여전히 도서관에 와서 사서를 찾는다. 왜일까?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사서의 끄덕임, 내 손에 쥐여주는 종이책의 무게감. 이 물리적 접촉이 주는 '신뢰'는 디지털 데이터가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시각장애인에게 정보 접근성은 곧 '사회와의 접촉(Contact)'이다. 웹사이트가 접근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사회가 나에게 "당신은 여기에 존재합니다"라고 손을 내밀어 만져주는 것과 같다.
반대로 접근성이 없는 사이트는 허공에 손을 휘젓는 듯한 고립감을 준다.
콩디야크의 철학은 우리에게 "더 많이 만지라"고 주문한다.
매끈한 스마트폰 화면에만 갇혀 있지 말고, 거친 종이책을 넘기고, 키보드의 반발력을 느끼며 글을 쓰고, 사람의 손을 잡아라.
그리고 정보의 바다에서도 '눈'을 너무 믿지 마라.
화려한 썸네일과 자극적인 제목 뒤에 숨겨진 본질을 손끝으로 더듬어라. 그곳에 거칠거칠한 진실의 저항이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찾아 헤매던 진짜 정보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진다. 그리고 확신한다.
만져지는 것만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