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Touch
우리는 ‘본다(See)’는 행위를 믿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며 시각 정보를 진리의 최상위 포식자로 둔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콩디야크는 고개를 저었다. “보는 것은 그저 망막에 맺힌 환상일 뿐이다. 진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만짐(Touch)’이다.”
시각은 거리를 둔다. 우리는 불타는 건물을 TV로 보면서 안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촉각은 거리를 소멸시킨다. 불에 손을 대는 순간, ‘뜨거움’이라는 고통과 함께 불의 실존이 나를 덮친다. 콩디야크는 말했다. “무언가를 밀었을 때 느껴지는 그 ‘저항(Resistance)’이야말로, 타자가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다.”
이것은 시각이라는 화려한 스크린이 꺼진 뒤, 오직 손끝의 저항값으로만 세상을 렌더링(Rendering)하는 한 남자가 눈으로만 흙을 빚던 도공을 만나 ‘진짜 흙의 맛’을 알려준, 어느 축축하고 흙내음 나는 오후의 기록이다.
대구 남구 이천동 고미술 거리.
오래된 기와집을 개조한 도예 공방 ‘토우(土友)’ 안에는 젖은 흙냄새와 장작 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김경훈 연구원은 그 습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어서 오이소. 눈먼 손님은 처음이네.”
걸걸한 사투리의 주인장은 장문수(60대) 도예가였다. 그는 평생 백자 항아리의 ‘완벽한 선(Line)’을 추구해 온 장인이었다.
“반갑습니다. 촉각 데이터를 좀 수집하러 왔습니다.” 김경훈이 웃으며 답했다.
장 도예가는 콧방귀를 꼈다.
“도자기는 눈으로 하는기라. 이 매끄러운 곡선, 티 하나 없는 유백색 때깔. 이걸 못 보고 우째 흙을 만지노?”
그는 자신이 만든 백자 달항아리를 김경훈 앞에 놓았다.
“자, 만져보소. 이게 내 40년 인생이라.”
김경훈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항아리를 더듬었다. 차갑고, 매끄럽고, 완벽한 대칭.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 이건… 너무 ‘매끄럽네요’.”
“당연하지! 유약을 얼마나 공들여 발랐는데.”
“아니요. 제 말은… ‘저항’이 없다는 뜻입니다.” 김경훈이 정곡을 찔렀다. “손끝을 밀어내는 힘이 없어요. 그냥 차가운 유리알 같습니다. 예쁘긴 하겠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은 안 드는데요.”
장 도예가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뭐라꼬? 니가 흙을 알어? 그래, 니가 한번 해봐라!”
그는 김경훈을 물레 앞에 앉혔다. 젖은 점토 한 덩어리가 물레 위에 올려졌다.
‘윙-’
모터가 돌아가고, 김경훈은 손에 물을 묻혔다.
“잘 들어보소. 흙은 거짓말 안 한다.”
김경훈은 조심스럽게 돌아가는 흙덩어리에 손을 댔다.
‘철썩.’
차가운 흙이 그의 손바닥을 때렸다. 그리고 밀어냈다. 원심력. 그리고 흙의 점성. 그것은 강력한 ‘저항’이었다.
“으윽….” 김경훈이 신음했다.
“힘으로 누르지 마라! 흙이랑 대화를 해야지!” 장 도예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김경훈의 머릿속에는 콩디야크의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저항을 통해 타자의 존재를 느낀다.’
이 흙은 지금 김경훈에게 저항하고 있다. “나 여기 있어! 나를 함부로 바꾸려 하지 마!”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 저항감이 김경훈에게는 짜릿한 ‘실존’의 감각으로 다가왔다.
그는 눈을 감은 채(원래 안 보이지만), 시각적 형태를 만드는 대신 흙의 저항과 싸우기 시작했다. 누르면 튀어나오고, 당기면 딸려오는 그 팽팽한 긴장감. 그것은 춤이었고, 투쟁이었다.
“자기야, 영화 <사랑과 영혼> 찍어?”
옆에서 지켜보던 보보가 웃으며 다가왔다.
“이거 생각보다 힘들어. 야생마 같아.” 김경훈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보보가 김경훈의 등 뒤로 와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네 개의 손이 젖은 흙을 감쌌다.
김경훈은 느꼈다.
가장 안쪽에는 차갑고 거친 흙의 저항이 그 위에는 자신의 손이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는 보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의 압력이 있었다.
“보보. 느껴져?” 김경훈이 물었다.
“응. 심장이 뛰는 것 같아. 흙이 막 살아서 꿈틀거려.”
두 사람이 만든 그릇은 장 도예가의 기준에서 보면 ‘망작’이었다. 찌그러지고, 비대칭이고, 두께도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그 표면에는 두 사람의 손가락 자국(Fingerprint)과, 서로의 체온이 뒤엉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장 도예가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허….”
“선생님, 어때요? 엉망이죠?” 김경훈이 웃으며 물었다.
장 도예가는 다가와서 그 찌그러진 그릇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눈을 감고 그릇을 만져보았다.
울퉁불퉁한 표면. 손가락이 훑고 지나간 거친 길. 그리고 두 사람의 힘이 부딪힌 지점들.
그것은 매끄러운 달항아리에는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니.” 장 도예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네. 나는 그동안 흙한테 ‘예뻐져라’고 화장만 시켰지, 이렇게 흙이랑 살 섞고 뒹굴지는 못했어.”
그는 자신의 매끄러운 손과, 흙투성이가 된 김경훈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콩디야크라고 했나? 그 양반 말이 맞네. 눈으로 보면 ‘불량품’인데, 손으로 만지니 ‘생명’이라.”
그때, 탱고가 다가와서 돌아가는 물레 옆에 떨어진 흙조각을 코로 툭 건드렸다. 녀석의 코에 흙이 묻었다.
“안 돼, 탱고! 먹는 거 아니야!” 보보가 기겁하며 흙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장 도예가가 웃으며 말렸다.
“놔두소. 개 코도 촉각 아입니까. 저 녀석도 지금 도자기를 감상하는 중이라.”
‘제목: 촉각(觸覺)의 아키텍처, 혹은 저항하는 실존.
시각은 우리를 속인다. 뜨거운 척하는 차가움, 부드러운 척하는 딱딱함.
하지만 촉각은 정직하다. 부딪혀야 하고, 밀어내야 하고, 아파야 한다. 그 ‘저항’이 없으면 우리는 유령과 다를 바 없다.
장 문수 선생님의 도자기는 아름다웠지만 고독했다. 오늘 우리가 만든 찌그러진 그릇은 못생겼지만 따뜻했다.
결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눈으로만 확인하는 사랑은 ‘상상 속의 아픔’이다. 진짜 사랑은 살을 맞대고, 서로의 고집(저항)을 확인하고, 그 마찰열로 서로를 덥히는 ‘물리적 충돌’이다.
…오늘 밤은 보보의 손을 꼭 잡고 자야겠다. 그녀가 나를 밀어내면(저항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내 옆에 살아있다는 완벽한 증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