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효율을 이길 수 없을까?
최근 중국의 명문대들이 회화, 조각, 예술교육 같은 전통적인 예술 전공을 줄줄이 폐지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가상공간예술'이나 '디지털 공연예술' 같은 이름도 생소한 융합 전공들이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AI)이 화가의 붓을 뺏고 조각가의 정을 대신하는 시대라며 탄식하지만, 경제학 부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산업 구조 전환에 따른 '불가피한 대체'일지도 모른다.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예술계에도 들이닥쳤다. 과거의 예술이 작가의 육체적 노동과 영감의 산물이었다면, 이제는 얼마나 고도화된 데이터를 다루느냐가 실력이 되는 시대다. 의상 디자인이나 제품 디자인 전공이 사라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이 며칠 밤을 새우며 하던 스케치를 AI는 단 몇 초 만에 수천 장씩 뱉어내기 때문이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통 예술은 이제 '가성비'가 맞지 않는 포트폴리오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묻게 된다. 손끝에 묻은 물감과 찰흙의 촉감이 사라진 '가상공간예술'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가의 '아우라(Aura)'를 느낄 수 있을까?
정보 접근성을 연구하는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융합'이라는 단어 뒤편에 머문다. 대학들이 AI와 가상현실을 앞세워 단과대학을 재편할 때, 그 새로운 예술의 문법에 '모두의 접근성'도 함께 설계되고 있을까?
가상공간예술이 주류가 된다면, 시각장애를 가진 누군가는 그 예술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 것인가. 기술의 발전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창작의 도구가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디지털 포용 사회'를 구현하려는 우리 연구팀의 과제가 예술 전공 폐지 뉴스 속에서도 무겁게 읽히는 이유다.
현재 연재 중인 <무장애 설계도> 시리즈를 집필하며 느끼는 점이 있다. 기술이 아무리 세상을 정교하게 빚어내도, 결국 그 속에 담길 서사와 감정은 인간의 몫이라는 것이다. 조각 전공은 폐지될지 몰라도, 무언가를 아름답게 빚어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도구가 정에서 마우스로, 다시 프롬프트로 변할 뿐이다.
내 곁에서 곤히 잠든 탱고를 본다. AI가 로봇 안내견을 만드는 시대가 오더라도, 탱고의 따뜻한 체온과 내 보폭에 맞춰 속도를 줄이는 그 다정한 배려는 대체 불가능한 '예술'로 남을 것이다.
예술 교육의 형태는 변하겠지만, 인간만이 줄 수 있는 그 투박한 온기까지 폐지되지는 않길 바란다. 내일은 대학 도서관에서 이 '가상공간예술'이 시각장애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데이터의 숲을 조금 더 헤엄쳐봐야겠다.
전공은 사라져도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안 앉아있는 5분'의 운동처럼, 우리도 낡은 관성을 버리고 새로운 도구에 적응할 '생존 근육'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