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이보그다

흰 지팡이는 도구가 아니라 '나'다

by 김경훈

베르나르 스티글러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함투성이"라고 말했다. 날카로운 이빨도, 추위를 막을 털도, 하늘을 날 날개도 없다. 그리스 신화의 에피메테우스가 실수로 동물들에게 모든 능력을 다 나눠주고,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옷(털의 보철), 칼(이빨의 보철), 스마트폰(뇌의 보철)을 발명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비장애인'은 없다. 맨몸의 인간은 모두 자연 상태에서 생존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이다. 안경을 쓴 사람, 자동차를 타는 사람, 스마트폰을 쥔 사람 모두가 기술이라는 '보철(Prosthesis)'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흰 지팡이를 짚는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니다. 당신이 스마트폰을 쥐는 것과 똑같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장착'일 뿐이다.


스티글러에게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신체의 확장이다.

나는 이 말을 매일 체험한다. 내가 흰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릴 때, 나는 지팡이 손잡이의 진동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팡이 끝(Tip)이 닿아 있는 저 1미터 앞의 아스팔트 질감을 느낀다.


뇌과학적으로도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면, 뇌는 그 도구를 신체의 일부로 인식한다고 한다. 나의 지팡이는 그리고 나의 스크린리더는 단순한 'Tool'이 아니라 나의 눈이고 나의 손이다.

그러므로 정보 접근성을 보장하지 않는 웹사이트는 내 손에 쥐어진 도구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나의 신체를 훼손하는 폭력'이다. 보철성은 곧 인간성이다.


텍스트에서 지적했듯, 기술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밤사이에 OS를 업데이트해 버린다.

비장애인에게 업데이트는 '새로운 기능'의 추가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생존의 위협'일 때가 많다. 버튼의 위치가 바뀌고, 제스처가 바뀌면, 나는 당장 내일 아침 은행 앱을 켤 수 없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술이 나를 끌고 가는 상황. 스티글러는 이를 인간이 기술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비동기화'의 상태라고 보았다.

우리는 기술 없이 살 수 없지만(운명), 기술은 우리를 배려하지 않고 질주한다(폭력). 여기서 우리는 '기술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스티글러는 기술을 '파르마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 약(Cure)이자 동시에 독(Poison)이라는 뜻이다.

AI는 시각장애인에게 이미지를 읽어주는 눈(약)이 되지만, 동시에 할루시네이션으로 거짓 정보를 주입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스마트폰은 세상을 연결해 주지만(약), 사용법을 모르는 노인들을 디지털 고려장으로 내몬다(독).

이 독성을 제거하고 약성만을 취하는 기술, 그것이 바로 내가 강조하는 '정보 리터러시(Information Literacy)'다.

단순히 기계를 켜고 끄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다. 기술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감시하고, 내 몸에 맞지 않는 보철(나쁜 UI/UX)을 거부하며, 나에게 필요한 형태로 기술을 길들이는 능력.

리터러시 교육은 기술의 노예가 된 인간이 다시 '기술의 주인(Operator)'으로 복귀하기 위한 유일한 투쟁이다.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기술적 존재(Technical Being)였다.

내가 스크린리더 없이 논문을 쓸 수 없듯, 당신도 스마트폰 없이 친구를 만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의존성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결핍을 인정하고 더 좋은 보철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를 더 잘 보게 하는 보철, 나를 더 잘 듣게 하는 보철, 그리고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따뜻한 기술.

우리는 그것을 만들고, 배우고, 고쳐 쓸 권리가 있다.

나는 오늘도 나의 하얀색 보철(지팡이)을 짚고,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파르마콘의 바다를 건넌다.

노예가 아니라, 당당한 선장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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