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엑스트라였다니

인류의 자존심을 꺾은 세 번의 따귀

by 김경훈

세상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신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으며, 우리의 이성은 완벽하게 통제 가능하다는 믿음은 참으로 달콤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라는 세 명의 '팩트 폭격기'는 인류의 이 거대한 착각을 무참히 깨뜨려 놓았다.



첫 번째 따귀, 코페르니쿠스의 "너희는 중심이 아니다"


첫 번째 사건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들고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인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별들이 우리를 위해 춤을 춘다고 믿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수많은 돌덩이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것은 단순한 천문학적 발견이 아니라 실존적인 재난이었다. 우주의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변두리 은하의 구석진 곳에 박혀 있는 작은 행성의 거주자라는 사실은 인류의 자존심에 커다란 멍을 남겼다. 정보 접근성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정보의 중앙집권 체제가 무너지고 우리가 '우주의 정보 소외 지역'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두 번째 따귀, 다윈의 "너희는 그저 운 좋은 원숭이다"


우주에서의 지위를 잃은 인류는 대신 '지구의 지배자'라는 타이틀에 집착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다른 동물들과는 근본적으로 격이 다르다고 자부했다. 이때 찰스 다윈이 등장해 두 번째 따귀를 날린다. 그는 인류가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그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다른 동물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조상이 고결한 신이 아니라 털 많은 영장류였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뒤테유의 초광속 이론을 빌려 생각해보면, 다윈의 통찰은 오히려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비록 육체는 하광속계의 동물적 본능에 묶여 있지만, 그 미천한 시작으로부터 우주를 사유하는 초의식까지 진화해왔다는 사실이 더 경이롭지 않은가. 내 곁의 안내견 탱고가 가끔 나보다 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다윈의 주장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 번째 따귀, 프로이트의 "너희는 스스로를 조종하지 못한다"


마지막 결정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날렸다. 인류는 자신의 행위가 고상한 철학이나 원대한 정치적 목적, 혹은 예술적 영감에서 비롯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아(Ego)가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우리가 내리는 고결한 결정들의 밑바닥에는 사실 성적인 욕망이나 파괴적인 충동 같은 원초적인 무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운 화려한 법과 제도, 위대한 발명품들이 알고 보면 짝짓기 파트너를 유혹하려는 원시적인 몸부림의 변형일 뿐이라니. 이쯤 되면 인류의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질 수밖에 없다. 선스타인의 넛지 이론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스스로를 조종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설계자가 깔아놓은 슬러지 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셈이다.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특별한 혈통도 아니며, 심지어 자기 마음조차 제멋대로 못 하는 존재.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인류의 성적표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 아님을 인정할 때, 타인의 시선을 공유하는 공동주의가 시작되고 정보의 평등한 접근성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깨달아야 할 진실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완벽한 설계도를 가진 창조주가 아니라, 결함투성이의 보철적 존재로서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가며 살아가는 실존의 아름다움 말이다. 인류의 자존심은 꺾였을지언정, 우리의 유쾌한 관찰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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