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면접관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가?

by 김경훈

과거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인재 선발 방식은 현대의 인사 관리 시스템이 보면 기겁할 정도로 원시적이고도 잔인했다. 화려한 이력서도, 까다로운 적성 검사도 필요 없었다. 그저 "아침 7시까지 오라"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것은 무한한 기다림이다. 아무런 안내도, 기약도 없는 상태에서 자정까지 그 자리를 지킨 사람만이 첩보 요원의 자격을 얻었다. 17시간 동안 오로지 '엉덩이의 힘'만으로 검증받는 이 시험은 실력보다 무서운 것이 '태도'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첫째, 의도된 진창(Sludge)이 걸러내는 진짜 실력


캐스 선스타인이 말한 '슬러지(Sludge)'는 보통 우리가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행정적 진창을 의미한다. 하지만 CIA의 이 황당한 면접은 슬러지를 아주 영리하게 활용한 사례이다. 정보기관 입장에서는 뛰어난 암기력이나 사격 실력보다, 극도의 지루함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과정에서 슬러지를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원클릭 결제, 초고속 인터넷, 15초 내외의 짧은 영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기다림'은 곧 '실패'나 '무능'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모든 장벽이 사라진 매끄러운 세상에서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인내 리터러시'가 퇴화한다. CIA의 대기실은 가장 불쾌한 슬러지를 깔아놓음으로써, 기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집요함을 선별해 내는 필터였던 셈이다.



둘째, 정보 과잉 시대의 역설: 전략적 무위(Strategic Idling)


현대 정보학의 주요 트렌드 중 하나는 '정보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이다. 우리는 잠시도 뇌를 쉬게 두지 않는다. 1분이라도 대기 시간이 생기면 스마트폰을 꺼내 끊임없이 텍스트와 이미지를 섭취한다. 그런 우리에게 CIA의 대기실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정까지 버틴 후보자들은 일종의 '전략적 무위'를 수행한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정보가 입력되지 않는 진공 상태에서도 자기 자신을 통제하며 상황을 관조했다. 데이터가 쏟아지는 시대에는 정보를 빨리 처리하는 능력보다, 불필요한 정보의 소음 속에서 침묵을 견디며 본질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능력이 더 귀해진다. 어쩌면 미래의 가장 강력한 정보 전문가는 가장 빠른 검색자가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기다림의 달인'일지도 모른다.



셋째, 150명 한계론과 자정의 생존자들


로빈 던바가 말한 150명의 한계론을 이 면접실에 대입해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아침 7시에 모인 100여 명은 처음에는 서로를 의식하며 '군중'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갈 때마다 그 집단의 성격은 변한다. 오후 5시가 넘어 소수의 인원만 남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서로의 인내를 목격하는 '그룹'이 된다.


그리고 자정, 마침내 홀로 남은 한두 명은 군중심리의 전염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립된 실존이다. 대중이 "이건 말도 안 돼!", "우리를 무시하는 거야!"라고 외치며 문을 쾅 닫고 나갈 때,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끝까지 응시한 자들이다. 르 봉이 경고한 군중의 피암시성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아키텍처'를 지켜낸 이들이야말로 국가의 기밀을 다룰 자격을 얻는다는 논리는 꽤 설득력이 있다.



오늘날의 기업들이 만약 이런 면접을 본다면 당장 SNS에 '악덕 기업'으로 박제되어 매장당할 것이다. 하지만 효율과 속도만이 정의가 된 세상에서 우리는 가끔 '자정까지 버티는 마음'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싶다. 무언가 결과가 즉각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시간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인생의 수많은 정체 구간과 지루한 대기실은 우리를 조종하려는 넛지가 아니라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시험하는 우주의 선발 과정일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을 지치게 하는 그 '기다림'의 시간 뒤에, 자정의 문을 열고 들어올 진짜 기회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은 그 자리에 조금 더 앉아 있어 볼 일이다. 엉덩이가 무거운 자가 결국 세상을 (혹은 자신을) 얻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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