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만족스러운 상태, 혹은 무언가가 가득 찬 상태가 좋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우리에게 '적당함'의 미학, 즉 중용(Golden Mean)을 제안한다. 2,000년도 더 된 이 철학자의 조언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며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연구자인 나에게도 꽤나 날카로운 통찰을 준다.
폴리스적 동물과 데이터의 공동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좁은 도시국가에서 서로 얽혀 살아가려면 극단적인 행동은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에러와 같다. 대구라는 도시에서, 혹은 경북대학교라는 캠퍼스 공동체 안에서 내가 내뱉는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타격을 주지 않으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중간'을 찾아야 한다.
중용은 단순히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른 가장 적절한 '최적값'을 찾는 과정이다. 겁쟁이가 되지 않으면서도 무모함에 빠지지 않는 '용기', 무감각과 방탕 사이의 '절제'. 이 정교한 저울질이야말로 인간이 갖출 수 있는 최고의 덕(Arete)이자, 공동체를 지탱하는 소스 코드다.
정보 리터러시의 중용 : 과잉과 결핍 사이
내가 연구하는 정보 리터러시 분야에서도 중용은 핵심적인 가치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면 '정보 빈곤'에 빠져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만, 정보가 너무 넘쳐나면 '정보 과부하'로 인해 판단력이 마비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보 교육 모형을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술을 아예 멀리하는 '기술 혐오'와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술 맹신' 사이에서, 우리는 기술을 주체적으로 다루는 '중용의 지점'을 찾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문제다. 논문을 쓸 때 너무 완벽주의에 빠져 한 줄도 못 나가는 '정체' 상태와,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를 마구 쏟아내는 '방종' 상태 사이에서 나는 매일 적당한 성실함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한 시스템 최적화
우리가 인생에서 크게 후회하는 순간들을 복기해 보면 대개 양극단에 치우쳐 있을 때다. 어제 마신 과한 술, 한순간의 감정에 치우친 퇴사 결정, 혹은 지나친 자기비하나 오만한 자랑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부터 중용을 의식한다는 건, 내 인생이라는 운영체제에 '안전 장치'를 설치하는 것과 같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도 후회하지 않을 적당한 지점을 찾아내는 것. 그 최적화 작업이 반복될 때 우리의 인생은 삐걱거림 없이 유연하게 굴러간다. 만족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이 끊임없는 저울질을 즐기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중용은 결코 미지근한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양극단의 유혹을 견뎌내며 중심을 잡으려는 치열한 의지의 산물이다.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사나운 사자를 길들여 마차에 매달고,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중용의 속도'로 연구실을 향해 걸어간다. 내 곁의 탱고가 내 보폭에 맞춰 걷는 그 리듬이야말로, 지금 내가 배워야 할 가장 완벽한 중용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