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톤의 돌덩이와 보이지 않는 비트코인

by 김경훈

명절이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건넨다. 여기서 말하는 복(福)의 실체를 전통 사상인 '오복'에서 찾아보면 건강(수), 재물(부), 평안(강녕), 덕(유호덕), 그리고 편안한 죽음(고종명)이 등장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오복 중 가장 뜨거운 화두는 역시 부(富), 즉 재물이다. 떡국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설 밥상머리에서 세대를 불문하고 부동산과 주식, 코인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이유도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 '부의 욕망'을 좇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폐의 본질은 신뢰라는 이름의 데이터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소개한 야프 섬의 '라이 스톤' 이야기는 화폐의 본질을 꿰뚫는다. 지름 3.6미터, 무게 12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덩이를 화폐로 썼던 그들이 거래할 때 실제로 돌을 옮기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들은 돌을 옮기는 물리적 노동 대신, 소유권이 이전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믿었다'.


결국 돈의 역사는 부를 저장하는 그릇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강력하게 신뢰했느냐에 대한 변천사다. 소금에서 금으로, 금에서 종이 지폐로, 그리고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비트로 변해온 화폐의 모습은 인류가 신뢰를 아카이빙해온 방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라이 스톤과 비트코인이 묘하게 닮아 있는 이유는 둘 다 물리적 실체보다 '공유된 믿음'이라는 데이터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대 갈등의 이면 : 서로 다른 신뢰의 그릇


설 연휴 한자리에 모인 세대들이 부를 두고 갈등하는 배경에는 이 '신뢰의 그릇' 차이가 존재한다. 어르신들에게 부의 상징이 눈에 보이는 땅과 건물(부동산)이라는 견고한 실물이었다면, 젊은 세대에게는 탈중앙화된 암호화폐나 플랫폼 속의 지적 자산이 새로운 신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국가의 법화(지폐)를 믿고, 어떤 이는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알고리즘(비트코인)을 믿는다. 형태는 다르지만 그 기저에 깔린 욕망은 같다. "내 내일이 오늘보다 안전하고 풍요롭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서로가 좇는 욕망의 대상이 다르다고 비난하기보다, 각 세대가 처한 시대적 환경이 어떤 신뢰를 강요해왔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복의 균형 : 부(富)를 넘어 조화로


우리는 '부'를 탐구하며 돈의 역사를 배우지만, 동시에 오복의 나머지 요소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재물이 풍족해도 몸과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강녕), 혹은 덕을 실천하며 얻는 기쁨(유호덕)이 없다면 그 부는 결국 구멍 난 그릇에 담긴 물과 같다.


화폐가 시대를 반영하는 신뢰의 거울이듯, 우리가 명절에 나누는 대화 역시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번 설에는 자산의 증식만큼이나 내 마음의 평안과 주변과의 조화라는 '복'의 데이터도 함께 인덱싱해보는 건 어떨까. 돈은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에너지지만, 그 에너지가 향하는 목적지는 결국 인간다운 삶의 완성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2톤의 돌덩이를 믿었던 야프 섬 주민들이나, 보이지 않는 코드를 믿는 현대인이나 본질은 같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며 삶을 지탱한다. 이번 설 연휴, 가족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서로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어떤 불안을 안고 '부'라는 복을 기원하고 있는지 가만히 귀 기울여보자. 신뢰가 회복되는 곳에서 비로소 진정한 복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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