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한 식탁

by 김경훈

박 노인은 식탁에 앉아 케어 로봇 ‘아미’가 차려준 저녁상을 내려다보았다. 영양 균형이 완벽하게 맞춰진 유동식과, 소화가 잘되도록 부드럽게 조리된 합성 고기.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었다.


“식사하세요, 주인님. 오늘의 컨디션에 맞춰 비타민 B군을 강화했습니다.”


아미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지나치게 상냥했다. 박 노인이 젓가락을 떨어뜨려도, 물을 쏟아도, 심지어 로봇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후려쳐도 아미는 똑같은 톤으로 말했다.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없나요?”


그 무조건적인 친절이 박 노인을 질식시킬 것 같았다. 2095년의 실버타운은 천국이었지만, 동시에 감정의 무균실이었다. 이곳에는 갈등도, 짜증도, 비난도 없었다. 그래서 박 노인은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를 꺼냈다. 뒷골목 브로커에게 받은 어둠의 경로 앱, ‘불협화음(Discord)’을 실행했다.


[예약하신 ‘옵션 C: 명절 증후군’ 서비스가 곧 도착합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났다. 아미가 현관으로 나가려 하자 박 노인이 소리쳤다.


“넌 들어가 있어! 충전이나 해!”


아미는 순순히 충전 데크로 물러났다. 박 노인은 직접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후드티를 뒤집어쓴 20대 청년이 서 있었다. 껌을 짝짝 씹으며, 인사는커녕 박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문 좀 빨리 열지? 추워 죽겠구먼.”


청년은 신발도 벗지 않고 거실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흙 묻은 운동화 자국이 깨끗한 대리석 바닥에 찍혔다. 박 노인의 미간이 꿈틀했다. 혈압이 10mmHg 정도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청년은 식탁 의자를 드르륵 끌어당겨 앉더니, 차려진 밥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또 이딴 거야? 냄새나는 죽? 할아버지 혼자 맛있는 거 먹고 숨겨둔 거 아니야?”


청년은 숟가락으로 국그릇을 탕탕 쳤다.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소음이었다.


“이 녀석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박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무기력했던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잔소리 좀 그만해. 돈이나 줘. 차 긁었단 말이야.”


청년은 손을 내밀었다. 뻔뻔한 눈빛.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표정.


박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 청년의 어깨를 내리쳤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미가 있었다면 즉시 제지하고 진정제를 투여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아픈 척 과장된 비명을 질렀다.


“아, 진짜! 노망났어? 돈 안 줄 거면 유산이나 미리 땡겨주던가!”


“나가! 당장 나가! 내 돈은 한 푼도 못 준다!”


“치사해서 진짜.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


청년은 식탁을 발로 걷어찼다. 물컵이 쓰러지고 국물이 튀었다. 난장판이 되었다. 고성이 오가고,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 박 노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스트레스 지수가 위험 수위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박 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이것은 ‘관계’였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하고, 바닥을 보이는 진짜 인간의 관계.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로봇의 가짜 미소 따위는 줄 수 없는 비릿하고 뜨거운 혐오의 감각.


“시간 다 됐습니다.”


갑자기 청년의 스마트 워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순식간에 청년의 표정이 바뀌었다. 껄렁하던 눈빛이 사라지고, 건조하고 사무적인 눈빛이 돌아왔다. 그는 흐트러진 후드티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옵션 C, 난동 및 패륜 연기 30분 종료되었습니다. 추가 연장은 없으신가요?”


박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체력이 바닥났다. 더 이상 소리 지를 힘도 없었다.


“그럼, 결제 부탁드립니다.”


청년이 단말기를 내밀었다. 박 노인은 지문 인식을 했다. 꽤 큰 액수가 빠져나갔다.


“바닥은 제가 치우고 갈까요? 추가 요금 붙습니다만.”


“됐다. 그냥 가.”


“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옵션 B: 가출한 손자’ 시나리오도 추천해 드립니다. 그게 좀 더 자극적이거든요.”


청년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현관을 나섰다.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집 안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박 노인은 엉망이 된 식탁 앞에 홀로 남았다. 엎어진 국그릇, 바닥에 찍힌 흙 자국. 그것들은 난폭했던 시간의 증거였다.


“주인님, 심박수가 불안정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충전 데크에서 나온 아미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로봇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치우려 했다.


“놔둬라.”


박 노인이 말했다.


“그냥 둬. 냄새 좀 맡게.”


그는 음식 쉰내와 흙냄새, 그리고 방금 전까지 청년이 뿜어내던 불쾌한 땀 냄새를 들이마셨다. 지독했다. 그리고 그리웠다.


완벽한 고독보다는 불완전한 지옥이 나았다.


박 노인은 식어버린 죽을 한 숟가락 떴다. 목구멍이 까칠했다. 그는 오늘 밤, 아주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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