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레도 집시 워터

럭셔리 글램핑을 떠난 가짜 유목민

by 김경훈

집시 워터는 신화화된 집시의 삶, 즉 자연과 가까운 자유로운 유목민의 정신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향수이다.

숲속에서의 야영, 갓 피어오르는 모닥불, 신선한 흙내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친 야생의 냄새보다는 바닐라와 샌달우드의 달콤하고 포근한 살냄새로 마무리되어, 사계절 내내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바이레도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이다.



노트 구성


탑 노트는 베르가못, 레몬, 페퍼, 주니퍼 베리이다. 상큼한 레몬즙과 서늘한 솔잎 향이 먼저 코를 스친다. 솔잎에 맺힌 이슬처럼 차갑고 상쾌한 시작이다.


미들 노트는 인센스, 솔잎, 오리스이다. 시원한 솔잎 향 뒤로 매캐한 향 연기와 파우더리한 오리스가 섞여 올라온다. 숲속에서 피운 작은 모닥불과 흙냄새를 연상시킨다.


베이스 노트는 앰버, 바닐라, 샌달우드이다. 초반의 서늘함은 온데간데없고, 아주 달콤한 바닐라와 부드러운 샌달우드가 피부에 찰착 달라붙어 따뜻하고 포근한 잔향을 남긴다.



전체적인 리뷰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지만 막상 텐트에서 자는 건 싫어하는 세련된 도시인의 럭셔리 글램핑 같은 향수이다.

차가운 숲속 공기로 시작해 달콤한 바닐라 라떼로 끝나는 반전 매력이 있다.

지속력이 매우 짧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특유의 포근하고 은은한 살냄새 덕분에 향수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럭셔리 글램핑을 떠난 가짜 유목민, 집시 워터의 달콤한 변명


세상에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기만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오늘 마주친 바이레도의 집시 워터가 바로 그 전형이다.

이름부터 집시, 즉 세상을 떠도는 자유로운 유목민이라며 당당하게 등장한다.

낡은 배낭을 메고 숲속에서 야영을 즐기는 거친 야생의 사나이인 척 폼을 잡는다.

과연 이 친구가 진짜 생존 전문가일지, 아니면 비싼 장비만 잔뜩 사들인 가짜 캠퍼일지, 날카로운 후각으로 그 실체를 벗겨보기로 했다.


첫인상은 제법 그럴싸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서늘한 주니퍼 베리와 레몬 향이 확 퍼진다.

마치 깊은 숲속, 소나무 잔가지들을 밟을 때 피어오르는 상쾌한 솔잎 냄새와 같다.

코끝을 스치는 찬 공기 속에서 은은한 향 연기까지 피어오르니, 영락없이 숲속에 피워둔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시각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이 향기를 맡으면, 서늘한 밤공기와 솔방울이 굴러다니는 흙바닥의 질감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탱고조차 산책하러 나온 줄 알고 꼬리를 흔들 만큼 자연의 향기를 훌륭하게 모방해 낸다.


하지만 이 야생의 카리스마는 채 삼십 분을 넘기지 못한다.

모닥불이 사그라들 즈음, 이 가짜 유목민의 정체가 탄로 난다.

배낭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것은 거친 호밀빵이나 육포가 아니다.

최고급 바닐라 시럽이 듬뿍 들어간 라떼와 달콤한 샌달우드 비스킷이다.

거친 바람을 맞으며 잠을 청할 줄 알았건만, 푹신한 오리스 가루가 뿌려진 최고급 구스다운 침낭 속으로 쏙 기어 들어간다.


결국 이 친구는 흙바닥에서 구르는 진짜 집시가 아니다.

에어컨과 난방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대형 텐트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재즈를 틀어놓고 즐기는 럭셔리 글램핑 족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바람 부는 벌판을 사랑한다고 떠들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달콤하고 안락한 바닐라의 품을 갈망하는 유약한 존재다.

보보와 함께 백화점 명품관을 거닐 때 맡았던, 잘 꾸며진 실내의 포근함이 이 향수에서 똑같이 느껴진다.


가장 어이없는 점은 이 친구의 빈약한 체력이다.

숲속의 낭만을 좀 더 길게 즐겨볼까 하면, 어느새 짐을 몽땅 싸서 집으로 도망쳐버리고 없다.

지속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허약한 체력 덕분에, 향기를 제대로 즐기려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강제로 다시 불러내야 한다.

참으로 피곤한 동행이 아닐 수 없다.


최종 분석 결과, 집시 워터는 거친 야생을 동경하지만 막상 벌레는 무서워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달콤한 환상이다.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밀자면 한없이 가벼운 녀석이지만, 그 달달하고 포근한 바닐라 잔향만큼은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추운 겨울날, 굳이 고생스럽게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전기장판 위에서 숲속 캠핑 영상을 보는 듯한, 아주 안전하고 달콤한 게으름의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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